북리뷰/문학반

[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신용목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6.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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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2017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2017

 

 

p. 12~13
가을과 슬픔과 새

슬픔이 새였다는 사실을 바람이 알려주고 가면, 가을
새들은 모두 죽었다.
사실은 흙 속을 날아가는 것
태양이라는 페인트공은 손을 놓았네
그 환한 붓을 눕혀
빈 나뭇가지나 건드리는데,
그때에는 마냥 가을이라는 말과 슬픔이라는 말이 꼭 같은 말처럼 들려서
새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네
사실은······이라고
다른 이유를 대고 싶지만,
낙엽이 새였다는 사실을 바람이 알려주고 가는 가을이라서
날아오르는 것과 떨어져내리는 것이 꼭 같은 모습으로 보여서, 슬픔에도 빨간 페인트가 튀는데
나뭇가지라는, 생각에 붓을 기대놓고
페인트공은 잠시 바라보네

그러고도 한참을 나는 다리 위에 앉아 있다 이 무렵, 다리를 건너는 것은 박쥐들뿐······
단풍의 잎들은 어둠속으로 떨어지고 단풍의 빛깔은 태양 속으로 빨려든다.
마치 태양에 환풍기를 달아놓은 것처럼
나는 지키고 있다, 나의 몸으로부터
붉은빛이 빠져나와 태양 속으로 빨려들아가는 것을,
나의 몸이 어둠속으로 떨어지는 것과 함께
그래서 박쥐들은 검구나, 슬픔과 몸이 하나일 수 있다는 것
모든 퍼포먼스가 끝나고 빨간 페인트통 뚜껑을 닫고 태양마저 사라지면
나는 혼자서 터덜터덜 다리를 건너며, 오늘도 잠이 오지 않으면 무엇을 세어야 하나, 하나부터······
생각하다가, 하늘을 뒤덮은 박쥐떼를 보며 문자를 보낸다
여기는새들이참많습니다가을만큼많아요

 

 

p. 31
숨겨둔 말

신은 비에 빗소리를 꿰매느라 여름의 더위를 다 써버렸다. 실수로 떨어진 빗방울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안개가 바닥을 어슬렁거리는 아침이었다.

비가 새는 지붕이 있다면, 물은 마모된 돌일지도 모른다.

그 돌에게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하구에서 빗방울 하나를 주워들었다. 아무도 내 발자국 소리를 꺼내가지 않았다.

 

 

p. 46~47
취이몽(醉以夢)

누가 돌을 던져서, 허공의 어디쯤 깨져나간 것이 내 머리는 아닐까? 세계의 뚫린 구멍이 내 생각은 아닐까? 그 둥근 틈으로 모든 침묵이 날아가버려서

우리는 취하고

하나씩 가로등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불빛처럼,

끔찍한 일이다.
생각은,
몸속 핏줄에 친친 감긴 돌이 위태롭게 켜놓은 심장 근처에서 휘어지는 칼날처럼······

나는 필요한 만큼 죽인다. 다행히 오늘은 술이 맑아서 무심코 몸의 심지를 적시면,
오래 감다 끊어버린 태엽처럼
늘 밤이었다.
밤은 얼마나 큰 돌이 지나가는 순간일까?

꿈은 그 돌이 떨어지는 수풀일까? 무엇이든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만 왔던 방법으로는 가지 못해서.

생각은 아물지 않는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은 날개이고 새가 갖지 못한 것은 날고 싶음입니다. 날개 때문에 새는 공중에서 떨어지고, 날고 싶어서 우리는 제자리에서 끝없이 추락합니다.
그가 말을 멈추지 않아서······
내가 날고 싶다고 해서 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내가 날 수 없다고 해서 날고 싶은 건 아닙니다.

우리는 날아서 왔습니다.

생각처럼,
생각처럼

검은 연기를 지피며 부딪치는 칼끝에서 돌 하나 붉은 심장으로 타오를 때.

 

취이몽: 醉 술취할 '취', 以 써 '이', 夢 꿈 '몽' 취몽: 술 취해 자는 동안의 꿈

 

 

p. 49
사랑

빗방울이 빗소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촛불이 꺼지면 박수 소리가 들린다.

누구나 한번쯤 창밖을 본다. 미처 챙기지 못한 우산 때문이라고 해도······

한명이, 왜 저러는 거야? 말하면, 거기 우산을 놓치고 서있는 사람이 보이고
두명이, 세명이 창가로 간다.

세개째, 네개째 입김을 분다. 다시 한명이 접시를 두드리면, 술잔을 들기 위해 일제히 돌아서고······ 유리에.
내리는 비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싶습니다. 써놓은 한사람을 찾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모인것일까.

이제 창밖엔 아무도 없다.

 

 

p. 58~59
카프카의 편지

나의 밤을 네가 가져갔던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거짓말처럼

환한 상점 불빛에 담겨 있던 저녁을
잊고

불 꺼진 상점 유리에 비쳤던 새벽을
잊고

달에 박혀 있던 비석들 떨어져 소용돌이치는 알코올 속으로 가라앉는다 거짓말처럼

모두 거짓말

그리고 하얀 고래가 투명한 뼈를 끌고 도착한다 마침내 되돌아오는 편지의 첫 줄처럼

인생은 씌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려고 부재하는 신에 관한 기록처럼

구겨지는 것이다.

 

 

p. 64~65
흐린 방의 지도

더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말이었으나 무리를 잃은 흰 날개의 메아리였다가 어느새 죽은 별들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안개처럼

골목은 간밤의 신열로부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식탁에 흩어놓은 약봉지 같다

내 안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는 대답을 막기 위해 밥을 먹어야 했다
내 귀의 구멍으로 밤을 구겨넣고 간
네 목소리의 아침

누군가 느낌을 담아가기 위해 사람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마트에서 부엌까지 비닐봉지에 비린내를 담아가듯 꿈과 꿈 사이로 이어진 생활을 지나가려고
누군가 내 뺨을 후려치고 그 손을 내 손목에 달아놓았는지도 모른다

이 기분이 새지 않는다

골목에 별들의 지문이 잠기는 방향으로 휘감겨 있다 손목에서 빙빙 돌아가는 비닐봉지
이제 너는 안개 속으로 손을 넣지 않는다 축축하게 식어가는 밤을 만지려 하지 않는다

왜 꿈에는 귀가 없을까? 아무리 소리쳐도 꿈속까지 들리진 않는데 왜 꿈에서 속삭이면 꿈 밖까지 들릴까? 골목에서는 질문을 멈추게 하는 알약이 팔리지만
여기서 외로움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응 나 여기 있어
별에서 막 흘러내린 안개처럼 자글거리는 조기를 뒤집어야 할 때를 보고 있었다

 

 

p. 68~69
산책자 보고서

어쩌면 허기진 쪽으로 기울어져가는 지붕의 망치질 소리로 비가 온다
지붕을 뚫지 못해 빗방울은 대신하여 빗소리를 집 안으로 내려보낸다

천장으로 끓어오르는 그림자를 간신히 누르고 있는 비탈의 오래된 집

끓는다는 말 속에는 불꽃의 느낌이 숨어 있다 비 오는 날 지붕이 끓는 것처럼
냄비 바닥의 불꽃 속에 숨어 있는 빗소리의 느낌을 라면 가닥으로 삼킨다는
말 속에는 또 비처럼 흘러내리는 몸의 느낌이 있다

나의 몸은 비를 대신하여 집 안에 고여 있다

나는 비의 느낌으로 숨어 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한사코 지붕에 부딫지는 빗방울을 지운다 바닥에 누운 나는 한사코 바닥에 차는 빗소리를 지운다
빗방울의 시간은 빗소리의 시간보다 더 멀리 있어서 빗소리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더 멀리 있어서 나는 끓는 허기일 뿐

하루는 그 간격을 오가는 시간으로 더 먼 곳의 시간들을 지우고 있다

시간의 반대편으로 뻗는 그림자로부터 간신히 몰락을 지우는 망치질까지

비는 냄비 속에서 불고 있다

 

 

p. 72~74
차갑고 어두운

겨울은 호수를 창문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호수에 돌을 던진다

네가 창문을 열었을 때 그 앞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오후의 까페에는 냅킨 위에 긁적여놓은 글자가 있고
연필은 언제나 쓰러져 있다 차갑고 어두운 것을 흘려보내고 난 뒤에, 남은 생각처럼

태양은 연필 뒤에 꽂힌 지우개 같지만 문지르면 곧잘 호수를 찢어버리지

바보처럼 깊이에 대해서 묻지는 말자,

왜 생각 속은 늘 차갑고 어두운 것일까 생각하면서

까페를 나와 호수공원을 돌고 있다

여기서 해마다 스무구씩 시체가 건져집니다 정말이라면, 우리가 죽이고 온 스무살이 해마다 돌아오는 거겠죠
무서워,
까페 간판에 불이 켜지는 시간이면

물을 닦은 냅킨처럼 안개가 피어오르는데 안개 속엔 꼭 안개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서,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움켜쥐고 무언가를 견디며

쿵, 바닥을 울리고 호수 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돌멩이를

오랫동안 올려다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생각,

냅킨 위에 한자씩 씌어지는 글자처럼 안개 속에서 한걸음씩 사람이 나타나서 내 눈을 찌를 것만 같은데·······

차갑고 어두운 곳을 생각하면 차갑고 어두운 곳이 생기겠지.

이렇게 호수공원을 돌다보면 안개는 공중에 띄워놓은 물속이거나 깨지는 순간의 창문 같아서
창문을 깨지 않고도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불빛 같아서,

나는 연필처럼 깎인 채 까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또 호수공원을 돌겠지만

생각 위에 글자를 쓸 때마다 금방 낙서가 된다

 

 

p. 87
아무렇지도 않게

창밖에 밤의 수염처럼 비가 드리워져 있는 날이 있다 어느 미용사가 지붕 위에 앉아
그 수염을 자르는 밤이 있다

눈물은 담쟁이 단풍처럼 창백한 뺨에 달라붙은 것처럼
언제든 창문은 결국 비를 떨구고

그러니까 수염이 점점 짧아져 더는 자를 것일 없을 때

가을이 간다

그러니까 하얀 뺨이 파랗고 따가운 뺨을 밤새 부빌 때

언제든 지붕은 다시 비를 만나고
창문은 담쟁이 단풍처럼 창백한 밤에 달라붙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을 쳐다보는 날이 있다 가위로 제 심장을 찌른 채 쓰러진 미용사의
젖은 발을 만지는 때가 있다

 

 

p. 120~121
내가 계속 나일 때

물이 끓는다
물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

아닌 것이 되려 하고 있다
물 
아닌 것이 되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보리차 티백을 넣는다.
베란다 화분에서 사철나무 잎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처럼 눈이 내리고

오랜전 봄날, 곰을 잡고 곰의 두개골에 화장을 해 숲으로 돌려보냈는데
그 곰이 하얗게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그때까지가 가을이었으니까

창밖 단풍나무 잎은 여태 지지도 않고 눈을 받고 있다 하나의 발자국이 다른 발자국의 바닥을 잠시 견뎌주고 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잠시 나를 받아주고 있다, 생각하면

몸은 신전처럼 더워지고 예배처럼 슬픔이 모여든다

그때까지가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그냥 살았을 뿐이다
나는 계속 나였다

내가 끓었을 때
그가 왔다

그리고 식어가는 시간이었다

 

 

p. 158
저지르는 비

울음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기 위하여 슬픔은 눈물을 흘려보낸다
이렇게 깊다
내가 저지른 바다는

창밖으로 손바닥을 편다

후회한다는 뜻은 아니다
비가 와서

물그림자 위로 희미하게 묻어오는 빛들을 마른 수건으로 가만히 돌려 닦으면

몸의 바닥을 바글바글 기어온 빨간 벌레들이 눈꺼풀 속에서 눈을 파먹고 있다

슬픔은 풍경의 전부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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