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당신의 아름다움] 조용미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5. 21:17
반응형

조용미 <당신의 아름다움> 2020

 

 

조용미 <당신의 아름다움> 2020

 

 

 

 

p. 12~13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다
내가 만든 구도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더불어
당신의 아름다움은

윤리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최종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빈틈없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고독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발생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늘
가장 큰 시련이다

당신 뒤에는 빛이 있다
당신은 빛을 조금 가리고 있다

 

 

p. 16~17
내가 없는 거울

자다 깨어 거울 앞 지나다 얼핏 보니
내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잠깐 잘못 본 건가
다시 거울 앞으로 가기가 겁이 난다

거울 속의 나는 통증을 알지 못하여
이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가
잠시 방심하고 내가 자고 있는 사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멀쩡한 몸을 감당하지 못하는 따분함도
그 아무 일 없음의 열락도 차마 모르는,
몸의 비루함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순정한 내가 저기 있다

여태 그가 보여주는 것만 보았다
누군가 아마도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을
진지함을 가장한 저 세계는
지금 이 순간의 나와 가장 먼 거리에 있다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아야겠다
나와 마주치기 꺼려 하는 차갑고
말이 없고 고독하고
복잡한 내가 저곳에 있다

몸을 씻고 나면 늘 마주 보게 되는
그 시간만은 정확하게 잊지 않고 나타난다
거울 속엔 몰래 사는 것들이 많다
내가 없는 거울을 들여다 보아도 되는 걸까

 

열락(悅樂):기쁠 '열', 풍류 '락' 기뻐하고 즐거워함. (불교) 유한한 욕구를 넘어서서 얻는 큰 기쁨

비루함 - 비루하다: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 유의어: 더럽다. 비겁하다. 추하다.

 

 

p. 18~19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빈소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 것 같다
며칠간 그곳을 떠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읽지 못한 긴 편지를 쓴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천천히
멱목을 덮었다

지금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길고 따뜻했던 손가락을 느끼며
잡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으며 우리의 다짐은 얼마나 위태로웠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나 초라했는지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이곳에서

당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짧은 세계를
의심하느라

나는 아직 혼자다

 

멱목: 소렴할 때 시체의 얼굴을 싸매는 헝겊. 천으로 네모지게 만드는데, 겉과 안을 흰색으로 하거나 겉은 검은빛 속은 남색으로 하기도 하며 네 귀에 끈을 매단다. (소렴: 운명한 다음 날, 시신에 수의를 갈아입히고 이불로 쌈)

 

 

p. 46~47
그날 저녁의 생각

내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던 그 저녁은 살아 있는 듯 몹시 추웠다 물건처럼 나는 한쪽 손을 전달했다 낯선 골목을 익숙한 듯 바라본다

당신은 나의 괴로움을 모른다 당신은 나의 정처 없음을 모른다 당신은 이 세계가 곧 무너질 것을 모른다

우리는 잠시 코트 주머니 속의 공간을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 당신이 그 순간을 기억해낼 수도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을 나는 염두에 둔다

우리가 아주 먼 오래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신이 하게 되려는 그 순간 손은 주머니에서 문득 빠져나왔다

그날 밤은 몹시 추웠던가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손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단정하게 손목 아래 가만 놓여 있다

당신이 하려던 생각처럼 우리는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 서너 번일지도 모른다 온전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나는 당신의 거짓을 모른다 당신의 죽음을 모른다 저녁의 감정을 가장한 당신의 슬픔을 모른다 이 세계가 실제가 아님을 모른다

 

 

p. 58
날개의 무게

모든 순간에는 끝이 있다
저 나비도 그걸 알고 있다
비 오는 날이면 늘 나비들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복사꽃 옆을 지나다 다시 돌아왔다
날개를 접고 꽃잎 아래 매달려 있다
더듬이와 꽃의 암술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큰줄흰나비 날개가 다 젖어 있다
무거워진 날개가 나비의 영혼을 붙잡고 있다
몸이 곧 영혼인 걸 너도 이제 알게 되었을 테지

무거워진 날개도 날개일 수 있는지 생각에 잠겨 있다
날개 때문에 날 수 없게 되었다
접은 날개로 깊은 사유에 들었다

나비와 나는 서로를 느끼고 있다
젖어가는 옷을 입고 나도 조금씩 무거워졌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빗속에 함께 있다

 

 

p. 69
정원

감추지 못하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열정 때문에 시간은 멈추지 못한다 텅 빈 삶을 어찌 사느냐 물었다 이 집요한 마음이 열정임을 이해하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무모함이 자라 견고함이 되었다

꿈에 내가 아는 아는 늘 말이 없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한 공간에 있을 뿐 어떤 말도 주고받지 못한다 꽃나무를 사이에 두고 잠시 마주 보았다 사람들은 얼굴이 없고 우리는 손이 없다

삶의 맹목성은 왜 극복되지 않는 걸까

8만 4천의 생각마다 모두 아름답고 향기로워 생은 꽃이 만발한 정원 같았다 눈먼 사람처럼 나는 이 넓은 풀밭을 생을 다해 헤매 다닐 테니

 

 

p. 70~71
마음

퍼붓는 빗속에서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헤매 다녔다
비는 지나치게 굵고
막 쏟아진 눈물처럼 뜨거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가 근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다정한데
나는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품고 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깨어났다

그녀는 누구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그녀는 고요히 내 이마를 짚었다
왜 빗속을 비명을 삼키듯 울먹이며 걸어 다닌 것인지

꿈속의 나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나이다

내 이마를 짚었던 그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꿈속의 나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내가 아닌 누구인가
그 여인이 나인 것만 같다

꿈속 나의 마음은 늘 나를 조심한다

 

 

p. 88~89
사랑의 비유

몸의 어딘가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고 있을 때,
낮부터 밤까지 종일 하늘이 노랗게 다가왔다 물러갔다하던 내출혈의 기억은
나의 것임이 틀림없는가 의심한다
악몽이므로, 기억의 출처는 낡은 혼란이 끌어다놓은 뭉개어진 난시의 깨알 같은 사전이므로
끝내 확인하지 않는다

굳은 선지 같은 검은 자줏빛 뜨거운 덩어리들이 목구멍으로 솟구쳐 올라올 때,
바닥에 널브러져 종잇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을 때,
지구의 어딘가에서 
나였던 누가 죽어가고 있는지 물어본다
몸 안에서 피가 줄줄 새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의심도 없이

일렁이는 하늘이 밤이 될 때까지, 까마귀가 지붕 위를 날 때까지
덧칠한다 노랗게, 노랗게

고통을 줄이는 것과 삶을 늘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본다
의심하지 못한다 피는 늘 네 안에 있다는 생각에 갇혀있으므로, 휘청거리는 발걸음은 묵은 연민 탓이라 믿으므로
몸의 어딘가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있을 때

 

 

p. 98~99
일관성

심연은 풍덩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천천히 빠져들어야 하는 걸까

당신 없이 무척이나 고요한 하루다

영장류 인간의 고독을 신은 감히 이해하지 못한다 먹먹한 겨울 아침이 으스스 수 세기 동안 계속된다

당신이 누구인지 이제는 알기 어렵다

시는 그가 누구라도 순교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했지만

당신이 누구라도 내 존재를 바꾸지 못한다 슬픔은 나의 일관성을 지켜준다

나는 이 세계의 불화와 늘 조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

마음 둘 데 없는 하루는
달까지 연장되곤 한다

나의 일관성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p. 104~105
물의 주름

물에 주름이 잡혔다 물의 주렴이 모여 물의 주름이 되었다
개울물 흘러내리다 멈춘 자국
여러 겹
얇은 망사 커튼이 흘러내린 듯 순간과 순간이 겹쳐져 있다

강추위가 물의 형태를 바꾸었다
영하의 온도가 물의 체적을 바꾸었다 물의 길이 비중을 바꾸었다
스스로 밀도를 변형시켰다
마른 나뭇잎들이 드문드문 무늬처럼 끼여 있다

무게는 바뀌지 않았다
그림자기 바뀌었다

물 위의 그림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얼음 언 개울 위는 투명한 물색 아래쪽은 맑은 회색
강추위가 물의 색을 바꾸었다

공은 그대로인데 색이 바뀌었다
물과 얼음은 같은 것일까

물 위에 서서 물을 느껴본다 물에서 물을 바라본다
물의 한가운데서 물을 만져본다 물 위에 떠서 글자를 써본다 물과 만나는 손끝이 시리다
흐르는 물의 정지 화면을 밟고 서 있다
물과 물 사이 나뭇잎처럼 투명해지고 있다

 

주렴: 구슬 따위를 꿰어 만든 발

체적: 넓이와 높이를 가진 물건이 공간에서 차지하는 크기. (수학) 입체가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 / 유의어: 볼륨. 부피. 용적

 

 

p. 116~117
당분간

지루하고 괴로운 삶이 지속된다
집요하게 너는 생의 괴로움에 집중하고 있다

생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미혹당했던 적 있었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손등에 바로 쏟아지듯 고통과 환희를 느끼며 펄펄 뛰었다

여긴 생이라는 현장이다
이렇게 생생하므로 다른 곳일 수 없다

무서운 집중 앞에 미망과 무명이 사나운 개의 이빨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뒤로 물러나기를 바란다
통쾌하다 비명을 지를수록 생은 더욱 싱싱해지고, 생생해지고

지루한 열정이 나를 지치게 한다
이 괴로움은 완벽하게 독자적이고 완벽하게 물질적이다

누구나 완벽하게 평화롭기는 어렵다 그래도
생의 괴로움에만 집중하는 순교자가 되고 싶다 아름답고 끔찍한 삶이 당분간 지속된다

 

미혹: 迷 미혹할 '미', 惑 미혹할 '혹' :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

반응형
B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