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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2021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7~19
몇 번의 계획
내가 없이도 너에게 소중한 것은
감은 눈 위로 아른거리는 햇빛
널 부르다 내가 머문 곳엔
아로새긴 우리의 이름처럼
선명하게 금이 간 유리잔 하나
너는 들판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눈에 담는다
부유하는 꽃씨들은 빨갛게 불타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본다
해가 지고 밤이 오면
우리는 가장 필요 없는 것들을 모아
불을 지펴야 하는데
몇 번의 계획을 모아 태워야
조금은 밝은 밤이 찾아올 텐데
우리가 손꼽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결국 혼자가 될 테고
어두운 하늘 속엔 검은 오리들
젖은 다리를 품에 꼭 감춘 채
황금빛 잉어들을 물고 날아간다
비늘 같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
우리는 이제 몇 번의 계획 속에서
또 어떤 것들을 가만히 담아두게 될까
또 어떤 것들을 외롭게 해야 할까
p. 24~25
지금은 밖
지금은 밖이라는 전화, 아직 멀어 오래 걸린다는 잡음 너머 더 멀리 돌아오는 너머에
먼저 나가 불을 켜두면 약속 없이도 찾아오던 골목을 다녀간 신발을 가지런히 모아두는 습관은 계속되었다 밤이 되면 창틀에 쌓였던 벌레의 날개들이 날아다니고 널 위해 담아둔 어떤 날의 날씨와 말들이 떠올라 일기에 적어두면 누군가 훔쳐간 것처럼 몇 년이 흘렀다
어두운 구석마다 가려둔 거울과 빈 화분의 가능성 이를테면 잠든 순간이 길어질 때마다 되새겨보는 것들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머뭇거릴 때
너는 빈 컵에 다시 물을 따르며 웃었다, 마실 수도 없는 물을
평생 닿지도 않을 거리를 두고 계단은 더 깊은 진창으로 쏟아졌다 제자리를 맴돌던 불빛을 기록하면 검은 뿌리가 창을 타고 흘러들었다 낯선 동물들이 모여들어 그 뿌리를 갉아먹었다 나는 사방 모든 벽에 못을 박았다 네가 가장 밝게 웃을 때 너를 그 벽에 걸어두고 싶었다
담장 가득한 넝쿨장미 가시 끝 빗방울이 서성이면, 오래된 낙서를 지우는 내가 있었다
어느 시절은 줄곧 흘러내려 담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굳이 아니라고 손새래 치며 거절하던 말로 문가를 서성였다 가장 어렸던 네가 방문을 잡고 방과 밖을 넘나들고 있었다
달력을 넘기고 있을 때
너는 아직 밖이라, 조금 더 기다리라 했다
누군가 훔쳐간 것처럼 몇 년이 흘렀다
p. 26~27
연애
그래서, 나는 기다렸단 암전 속에서
하지만 연극은 여전히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나팔을 불려 뛰쳐나와 사라진 춤을 췄다 액자 속에 갇힌 네가 멋진 동작을 할 때마다 샴페인은 머리로 쏟아졌다 항상 내 주머니로 날아오던 코르크 마개 그건 고심해왔던 표현이었다
빈 화분에 빛나던 지지대를 박아 넣으면 너는 식은 커피를 마시고 끝나지 않는 밤을 구경했다 아침이면 찢긴 종이와 옷가지를 다시 주워 찢었다 불면 속 별자리가 귀에 대고 신음했다 그때마다 너는 벗어둔 신발의 주름을 세어보고 우린 이렇게 많은 거라며 소리쳤다
때론 낡은 장을 짜서 일기를 박아두었다 거기에 온종일 낯선 고개를 들이밀다가 네가 보낼 하루를 내가 먼저 살았다 자주 했던 말을 손에 쥐어주고 돌아서면, 시간은 앉은 자리를 더럽히고 다시 말을 걸 땐 모르는 소리를 따라했다
땔 수 없이 우리의 잠이 엉겨붙을 때
알고 있는 이름을 모두 내어주었을 때
이때쯤 다시 나팔을 꺼내들면, 나팔은 사랑스럽게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데
코앞에서 내 얼굴을 만지는 너를 두고 다시 밝아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다 보니 어두운 게 좋아졌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암전 속에서
p. 32~33
일기
익숙함 때문에 찢어버린 문구가 어느 날 늑골처럼 아늑하다 느낄 때
영원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보다 더 아름다울 때
그런 날이 누구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은 날
어디론가 계속 옮겨 다니는 오늘이 지나 아직은 행복한 내일의 마음을 끌어다 쓰고 발바닥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내 기분을 거기 전부 적어둔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건 영원히 내 것이 아니듯
등 뒤로 떠나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고
어떤 날에는 며칠쯤 일찍 찾아올 불행을 느낀다
그런 날에는 고작
나도 혼자 뛰어내릴 수 있는 절벽쯤은 가지고 있다고 말해보지만
허나 발을 구르면 빛나는 비명들에 대해
불이 켜진 방에 가만히 앉아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지난날에는
숙취보다 오래가는 불안함에 대해
꾸꾹 눌러썼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씨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없는 글씨
분명 지나간 일들이라 적었지만
그래도 종종 그 시간을 다시 살게 되니까
어떤 것들은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예언이 되어도 좋겠다
어떤 것들은 미리 써둔 일기기 되어도 좋겠다
p. 46~47
대화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 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 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과 저곳의 국경을 넘는 사람인 거 같아
누워 있는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할 때
구겨진 새의 몸을 손으로 감싸서 누구한테 내밀듯
나도 어떤 말인지 모를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새의 부리가 날 보고 웅얼거리는 것 같아서
내 귀가 어쩌면, 파닥거리다가 날아갈 것 같아서
나무옹이를 나뭇가지로 쑤신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삼키지 못할 것들을 밀어 넣듯이 밀어 넣는다
p. 112~113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침묵하며 살을 맞댄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머리
석탄처럼 타들어가는 누군가의 울음이
따뜻하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밖에선 비가 오고 있을까
짙은 안개가 들머리를 돌아나가면
저 어느 틈에서라도 잊고 살았던 빛이 들까
젖은 눈으로 서로를 지켜보는 날
누구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은 날
한참 동안 눅눅한 먼지가 목을 죄어오고
내 손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왜 가장 먼저 나를 의심하는가
아내의 하얀 손을 잡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손을 잡고
이곳에선 가장 따스한 빵을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는 차라리 내가 돌이 되어버렸더라면!
암벽의 균열은 미지근한 핏줄처럼 흐른다
우리는 조그만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조금씩 나누어 마신다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식량은
아직, 누구도 꺼내지 않은 말들이라고
꿈조차 소화되는 캄캄한 불면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해가 뜬 시간에도 해는 지고
우리는 자꾸 기쁜 생각을 하려 한다
마음으로만, 마음으로만
들머리: 들어가는 맨 첫머리. (유의어: 길목. 어귀. 입구). 들의 한쪽 옆이나 한쪽 가장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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