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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시집, 영화 <좋아해줘>에서 유아인이 들고 있던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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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2008

 

 

 

영화 <좋아해줘>에서 조경아 작가(이미연)가 노진우(유아인)에게 "너의 길을 가라..."라는 글귀와 함께 선물했던 시집. 노진우(유아인)가 그 시집을 뒤적이다가 둘이 찍은 사진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시집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8~19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잿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간혹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꽃말의 뜻을 꽃이 알 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
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였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p. 20~21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p. 26~27
피할 수 없는 길

이 길은 어제도 지나갔던 길이다
이 길위에서 사람들은
오직 한 사람과만 마주칠 수 있다
수치심 때문에
그는 양쪽 귀를 잡아당겨 얼굴을 덮어놓는다
그러나 이 길 위에서
말해질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그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있다
수치심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과 얼굴울 바꿔놓는다
그러나 왜 말해질 수 없는 일은
말해야 하는 일과 무관한가, 왜
규칙은 사건화되지 않는가
이 길은 쉽게 기억된다
가로수들은 단 한 번 만에
나뭇잎을 떨구는 데 성공한다
수치심을 잊기 위해
그는 가끔 노래도 하고
박수도 친다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 없다

 

 

p. 42~43
착각

구름이 내게 모호함을 가르치고 떠났다
가난과 허기가 정말 그런 뜻이었나?
나는 불만 세력으로부터 서둘러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대들은 나의 영원한 동지로 남으리
우리가 설령 다른 색깔의 눈물을 흘린다 한들
굳게 깍지 꼈던 두 손이 침착하게 풀린다
좋은 징조일까?
그러나 기원을 애원으로 바꾸진 말자
붙잡고 싶은 바짓가랑이들일랑 모두 불태우자
깃발, 조국, 사창가, 유년의 골목길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
지나가던 여우가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그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있는
너 또한 하찮아지지 않겠니?
지금은 원근을 무시하고 지천으로 꽃 피는 봄날
그렇구나, 저 멀리 까마득한데
벚꽃은 눈 시리게 아름답구나
여우아, 나는 이제 지식을 버리고
뚜렷한 흥분과 우울을 취하련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저 꽃은 네가 벚꽃이라 믿었던 그 슬픈 꽃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나가던 여우는 지나가버렸다
여기서부터 진실까지는 아득히 멀다
그것이 발정기처럼 뚜렷해질 때까지 나는 가야한다
가난과 허기는 또 다른 일이고

 

 

p. 46~47
전락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존재가 비존재를 향해
무인 비행선이 하늘에서 지그재그로 추락하듯
느리게 굴러 떨어지고 있다
나는 감정에 충실했고
나쁜 습관은 버렸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어쩌면
키 크고 잘생긴 회계사가 될 수도 있었다
허나 어떤 악덕이 생을 여기까지 끌어내렸다
동요하는 눈동자와 망설이는 입술 때문인가
백 명의 친구와 열 명이 애인 때문인가
나는 모든 예감에 주의를 기울였고
폭설과 폭우는 되도록이면 피했고
언젠가는 좋든 나쁘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리라 믿었다
허나 빌어먹을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고
애수에 빠져 흑백영화를 보다
오오, 저 찬란한 핑크, 핑크! 외쳐댈 뿐
스스로를 견딜 수 없다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전락했고
이 순간에도 한없이 전락하고 있다
길 잃은 고양이들이 털을 곤두세우고 쏘다니는
호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흉조로 해석되는
이 복잡하고 냉혹한 거리에서

 

 

p. 88~89
천 년 묵은 형이상학자

환상과 지식이 만나면 고통뿐이다
의자 위에서 심하게 훼손된 그의 인생을 보라
천 년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별은 두 배로 늘었고 달은 지구와 합쳐졌다
견고한 아름다움을 갈고 닦던 시절은 끝났다
구원을 깔끔히 포장해주던 하얀 손들도 사라졌다
마음은 온통 물컹해지고 뒤죽박죽 섞여
쾌락과 예의와 명철함이 구별되지 않는다
천 년 동안 그는 의자 위에서 의자의 의지로 앉아 있다
앞산에는 천 년을 참다 터진 웃음처럼 꽃들이 만발하다
오래전 그 등산길을 죽은 아내와 거닐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태운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이제
심장에는 나쁜 피조차 흐르지 않으니
우편배달부는 그를 낡은 인쇄물이라 했고
검시관은 잘린 신체의 일부라 했다
그는 자신이 의자의 유령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그의 몸은 의자로부터 분리되어
미분류 딱지가 붙은 상자로 옮겨져
영원한 어둠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상자 뚜껑이 닫히기 직전
영원하라, 형이상학이여, 의자에의 의지여!
그가 온 힘을 다해 절규해보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p. 122~123
그때, 그날, 산책

그때 참 추운 겨울이었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산책을 했네
그날 큰 눈이 내렸네
살얼음만으로 적설을 견디는 호수
더러운 땅을 기억하는 발자국들
길 끝의 작은 잿빛 점은
우리를 기다리는 큰 개였네
공원에는 유명한 가수가 묻혀 있었네
"그 어떤 따스함이 세상을 감싸리"
그의 노래는 빛나는 명성을 남겼으나
무덤 위엔 죽은 꽃들의 잔인이 가득했네
그날 큰 눈이 그치고
쌓인 눈은 조금씩 얼음의 두께를 더했네
다음 번 내릴 눈에 대해
호수는 걱정을 덜었으나
그때 우리의 심약한 마음은
미래를 자주 떠올리며 쩡쩡 금이 갔네
그때 참 짧은 연애였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산책을 했네
그날 큰 눈이 내리다 그쳤네
그날 큰 개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네
우리의 마지막 산책이었네
그때는 알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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