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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김미령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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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령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2021

 

하얀 겉표지를 벗기면 나오는 속표지.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4~15
작용

거기 서! 하고 말했지만 계속 줄지어 가는 것들이 있다.
가고 있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말하기 전에 이미 다 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쪽 유리창에 김이 서린다.

굳이 세우려던 것이 아니라면 불러 볼 필요는 없지 않았냐고 누가 말하는 것 같다.

이리로 와! 하고 말했지만 역시 오지 않았고
대신 공이 이쪽으로 굴러왔다.
공에서 시선을 주는 동안 충분히 지나갔을까 생각했지만 아직 거기 있는 것은
미안해서라기보다 무엇을 할지 몰라서였고

언제든 생각나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올 것이지만
오지 않더라도 후회는 누구의 것도 아니겠지.

오지 말고 그냥 가!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뒤여서
그것이 방금 내가 한 말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는 사이

해가 진다.
이미 몇 번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 반응한 것은 귓바퀴 안을 맴돌던 바람뿐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도 없는 여기서 그러는 걸 아무도 모르는 게
조금 안심이 된다.

 

 

P. 36~38
가볍고 무의미한 수많은 정지 중 하나

쌓인 모래가 있다. 파인 모래가 있다. 밀려오는 모래가 있고 밀려가는 모래가 있다. 검은 모래와 흰 모래가 있으며 마른 모래와 젖은 모래가 있다.

누군가 모래 위에 낙서를 하다가 막대를 박아 놓고 간다. 막대가 조금씩 기울어진다. 쓰러진 막대를 파도가 물로 질질 끌고 간다.

한 장면이 거기서 끝이 난다.

웨딩 촬영하는 신부가 포즈를 잡는다. 드레스 자락이 젖기 직전이다. 신부의 허리가 휜다. 조금 더 휜다면 바다는 끝이 날 것이다. 바다가 눈을 감으려는데

오늘의 계획은 급히 수정된다.

원래 여기 오기로 돼 있었던가. 오늘은 언제 시작됐으며 우리는 언제부터 이곳에······

비둘기와 갈매기가 뒤겄여 서로의 발자국을 쫀다. 다 같이 빙빙 돈다. 모래 위에서 같은 모이를 먹고 서로의 구멍을 쳐다보다가

교차하며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또 한 장면이 거기서 끝이 난다.

여기 한 사람이 앉아 있고 저 앞에도 한 사람이 앉아 있다. 여기 두 사람이 앉게 되자 저기 한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 다시 저기 한 사람은 두 사람이 되고

그제야 여기 한 사람은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조금 더 기다렸다면 옆에 앉은 이가 누군지 볼 수 있었지만

모래 위에는 아무도 없다.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바라보고 있다. 바다에 가야겠다는 어제의 생각 속에는 무언가의 뒷모습이 보였지만 이제는 투명해진 그것의 웃음만 보인다.

모래 위를 뒹구는 쓰레기들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여름의 끝

빗방울이 흩날린다. 모래 위에 작은 구멍들이 생긴다. 비를 피하려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이 이상한 소리를 낸다. 모래 구멍이 점점 더 커져 빨려 들기 전에 얼른 달려야 한다.

이 모든 장면과 상관없이 서 있던 한 사람은
뛰지 않는다.
그의 바다에는 그런 장면이 없으므로

젖은 모래는 날지 않는다.

 

 

P. 74~75
구부정하고 초조한 빛

서로 꽉 껴안고 있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팔이 다리를 감고 다리가 어깨를 감싸고 있다.
두 몸이 하나로 뭉쳐져 머리가 어느 가랑이 사이에 끼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떨어진 책을 엎드려 줍지도 못한다.
껴안은 채 그냥 다른 이야기를 짓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상 이야기
껴안은 채 가슴 앞에서 채소를 키우고 개도 키우는 이야기
당신이 첫 문장을 시작하면 나는 다음 문장을 이으면서
함께 종종거리다
발이 엉겨 쓰러지기도 하면서.

겨우 일어나 보면 따로 떨어져 있어 깜짝 놀라겠지.
그러면 얼른 다시 부둥켜안자.
이 자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자.
서로의 체액을 흔들어도 좋다.
흔들다 지치면 햇빛 아래 쉬다가 어디론가 공처럼 굴러가도 좋다.
당신의 발로 내 얼굴을 씻고
내 손으로 당신의 구멍을 간질이면서
서로에게 남아 있는 여백을 비틀어 그곳에 작은 의자라도 놓으면 좋을 것이다.

바람이 머물다 가고 새가 앉았다 가고
구름이 오고 비가 오고

물을 친다.
무엇으로든 친다.
간헐적인 깜빡임으로 우리의 맞붙은 심장 소리로
손가락을 뻗어 구름의 바닥을 칠 수 있다면 어디든 우리 기별을 전할 수 있겠지.
먼 흙의 아가미가 부풀고
늦음 잠의 덧문이 들썩이고
살과 살 사이에 갇힌 비들이 웅성이며 범람하기 시작하면서
묶여 있던 팔다리가 스르르 풀려나 어느새 물 사이를 헤엄쳐 다니면서

 

 

P. 76~77
역재생

바닥의 공이 비스듬히 날아가 정확히
손바닥에 달라붙는다.
방금 무엇도 그의 손을 떠난 적 없었는데 그것은 공의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긴 산책로 펼쳐져 있고 돌아가려고 뒤를 보면 그의 장소는 모든 곳에 빛으로 뿌려져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는 거꾸로 반복해도 오가는 것뿐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고
거꾸로 발음할수록 원래와 닮아 가는
어떤 이름

그의 손엔 오래점 아침을 시작한 다섯 개의 물방울이 쥐어져 있었는데

전생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는, 터질 듯한 표면 안에서 다급히 창을 두드리는 손이 보이고
확장된 물방울 속으로 구불구불한 길이 빨려 들어간다.

그 길을 한 사람이 걷고 있고 이어서 다른 한 사람이 따라 들어가는데

그가 시공을 너무 앞서 오는 바람에 먼저 걸어간 자신을 앞질러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끝내 하지 않고

 

 

P. 86~87
기다리는 마음

자루를 벌려 잡고 있으라 하고 창고로 들어간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처마를 받치고 서 있으라 하고

젖은 빨래를 펼쳐들고 다 마르도록 옥상에 서 있으라 하고

지붕 위로 구름은 몰려드는데

그 큰 강을 끌고
그 많은 들판을 다 지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크고 작은 쭉정이들을 골라내느라 후후 불어 고스란해진
저녁이 오고

자루 끝을 잡고 서 있지 않고
자루 속에 앉아 쉬는 사람

멀리 안개가 밀려오는데
아픈 아이에게 저 잿더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신을 찾아 신고 나올고 등 떠미는 꿈

명아주 가득한 학교 소각장에서 저물도록 피어오르는 연기

때를 넘긴 약속이 마른 옥수수대로 서 있는 그곳에
늦은 산책을 다녀오는 사람처럼

눈 속의 무심한 들을 다 보여 준 뒤
지금까지 기다린 사람에게
이제 그만 가시면 좋겠다고

만나면 세워 두는 사람으로

 

 

P. 120~121
계단이 많은 실내

네게 가는 도중에 너 비슷한 사람을 본다. 그는 그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속삭이다 금방 헤어지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러 개의 복층으로 이루어진 높은 천장 아래
서로 다른 모양의 계단과 크고 작은 복도가 하나의 단면으로 읽혀지는 순간의 너의 위치

너는 동쪽 계단을 내려가고 나는 북쪽 계단을 올라와 우리가 만나기 직전일 때
계단의 끝에서 또 다른 공간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다시 어디로 연결될 것인가.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은 정말인지 전화 속 네 목소리는 물속인 듯 먹먹하게 들리고

내 입속은 텅텅 울리는데

아무래도 옆에 걸린 액자를 로비 쪽으로 우르르 떨어뜨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움직이던 계단도 멈추고 오르내리던 걸음들도 공중에서 일제히 멈춰
여러 겹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일직선으로 통과한 눈빛이 서로 반대편의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하게 될 순간이 올 것이다.

빙고! 하고 낮게 탄식하게 될
흔한 미래
그러다 꿈에서 깬 듯 다시 발을 옮기겠지만

금세 계단이 움직여서 우리는 또 헤매게 될 것이고
우리의 자유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되는데.

 

 

P. 136~137
고도제한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두 개의 시제 사이로 걸어간다.
어떤 시절로부터 출발했는지 모르고
소실점 저 끝이 시간도 알 수 없는

막다른 순간의 결정 같은 칠 일의 낮과 밤 속으로

손을 뻗어 나무를 느끼려던 감정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그의 미래를 빼앗긴 장면
날카로운 겨울의 가지 끝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긴 손가락들

그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그에게 어떤 경험과 예감이 허용된 것인지 그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걸어가는 그의 테두리를 허물고 있는
빛의 침식

그는 내게만 보이지만 나는 그를 통제할 수 없고
나는 그로부터 태어나는 문장을 사생아처럼 받아들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가 그를 연습하는 동안 언제 내 앞에 걸려 넘어지게 될지 몰라 불안해하면서도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행위들로 나의 백지가 채워지고

해 질 녘의 무심함은 그를 정교하게 빛나게 하고
혼자 우뚝 서 있게 하는데

그러나 다시 그가 제 몸에 대한 기억을 축적해 가는 동안 내게 건네줄 마지막 뒷모습까지 모두 지우려는 듯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어떤 암시도 없이

그 자신으로부터 무섭게 돋아나고 있는 새로운 의욕들을 조심스레 감지하면서 멀어지고

 

 

P. 148~150
스쳐 간 나를 잠시 불러 세우고

그는 가끔 내 앞을 스친다.
얼굴을 본 적 없는데 가끔 떠오르는 이유를 모른다.
자리에 누우면 생각난다.
양말 속에 발을 넣다 생각나기도 한다.
언젠가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온 순간 오토바이가 그를 덮쳤을 것이다.
우리 앞에서 땅이 푹 꺼져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계획돼 있었고 또 다른 우연이 우리의 직전을 거둬 갔을 것이다.
초인종을 누르자 방 안에서 인기척도 없이 그를 보내 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다급한 나의 이웃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도 그를 잃어버려 나에게 물으러 왔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왔다가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그의 어깨를 그대로 가져갔을 것이다.
누구의 어깨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누군가 또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대로를 가로질러 성큼 다가와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돌아섰을 것이다. 
붐비는 거리에서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져서 인파를 헤치며 뛰어갔을 것이다.
돌아가서 욕조 속에 얼굴을 박았을 것이다.
욕조 속을 헤엄쳐 빛이 들지 않는 심해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을 누워 있었을 것이다.

그는 누워서도 가끔 내 옆을 스친다.
나와 함께 나무 꼭대기에 나란히 앉아 먼 불빛들을 바라보지만 옆을 보면 다시 사라지고 없다.
그게 언제인지 금세 기억이 희미해지고
다음에 그가 또 내 앞을 스치더라도 그인지 모르고 무심결에 지나치겠지만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른 후 무엇을 회복한 건지도 모르고 우리의 간격에 무한한 비가 쏟아질 때

순식간에 그와 가까워진 듯한 기분에 흠뻑 젖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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