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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공항철도> 2021
<공항철도> 최영미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0~11
너무 늦은 첫눈
세검정에서 시작해
서교동의 카페에서 멈춘
첫눈
나에게만 보이는 눈
나에게만 보이는 너
나에게만 보이는 그 남자의 뒷모습
나에게만 빛나는 사람
다시 오지 않을 인생의 한때를
빗자루로 쓸고 있다
그는 알까?
그토록 쉬웠던 우리의 시작
그렇게 오래 연습한 마지막
돌아서면 사라질
너 없이도 아름다운 풍경을 쓸며
살아있다 펄펄
하얀 종이 위에
p. 27
진실
사람들에게 진실을 들으려면
어린애처럼 바보처럼 보여라
무릇 인간은 술 취했을 때,
그리고 어린애 앞에서
솔직해지거든
p. 36
운수 좋은 날
단골식당에 12시 전에 도착해
번호표 없이 점심을 먹고
서비스로 나온 생선전에 가시가 하나도 없고
파란불이 깜박이는 동안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
"환승입니다" 소리를 들으며
(교통비 절약했다!)
버스에 올라타
내가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고
내가 누르지 않아도 누군가 벨을 눌러
뒤뚱거리지 않고 착지에 성공해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익숙한 콘크리트 속으로 들어가
배터리가 떨어졌다는 경고음 없이
현관문이 스르르 열리는 날.
p. 43
낙서
사랑과 분노가 있어야 큰일을 한다
이제 분노할 힘도 없다
분노할 열정이 있다면 연애를 하든가,
맛있는 거 찾아 먹겠다
p. 66~67
내 청춘의 증인
가슴선 밑으로 머리를 기른 적이 없다
기르고 싶었지만
더 늙기 전에
가슴에 닿는 머리를 소망했지만
너희들이 떠난 뒤 또 짧아진 머리
보기 좋게 자랐다 싶으면
어떤 거시기를 만났고
보기 좋게 길다 싶으면
어떤 거시기가 나를 떠났다.
내가 그를 떠났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귀를 덮는 단발보다 길지 못했던 내 청춘
어깨까지 내려올 만큼
길게 늘어진 연애는 없었다
(언니 마음대로 자르세요!)
짧은 커트에 적당히 길이 들면
그 길을 타고 새 남자가 나타났지
반듯한 남자는 없었어
p. 82~83
면회금지
인생,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거다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어느 날
당신이 혼자가 아니었던 그날
내 옆에서 무심하게 쳐다보지도 않고
수술하러 입원하기 전날,
내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당신은 웃었다
엄마가 나를 보고 웃다니
그렇게 환한 미소는 처음이었다
어머니의 첫사랑은 누구였을까
어머니의 첫사랑을 내게 고백한 날
고백한 게 아니라 내가 맘대로 추측한 건데
"그 남자가 노래를 아주 잘했어"
같은 동네 이웃한 집
창 밖에서 그 남자의 노래를 염탐하던
어머니의 처음을 나는 모른다
어머니의 마지막을···모르고 싶지 않다
p. 84~85
불면의 이유
요양병원의 좁은 침대에 갇혀
봄이 오는지도 모르는 엄마
착한 치매에 걸려
환자가 아니라며 환자복을 벗고
"나 아픈 데 없다
내가 집이 없어 여기 있지"
언제나 핵심을, 핵심만을 말하는 당신
"나도 너 따라 가련다"
일어나려는 엄마를 두고 병실을 나왔다
어미가 누웠던 작은 방의 침대에서
하얀 공을 넘기고 되받는
아주 쓰잘 데 없는 테니스 경기에 박수치다
당신이 있던 자리가 아프다
소설을 쓰려고 나는 엄마를 버렸다
청동정원에 들어가려고 엄마와 남자를 버렸다
더 슬픈 기억은 따로 있다만, 쓰지 못한다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망가뜨릴 것이다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는
시가 대체 뭐란 말인가
청동정원: 최영미 시인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2013년 여름부터 1년간 계간 <문학의 오늘>에 연재한 것을 묶은 것이다. 1980년대를 살아가는 이애린이라는 주인공은 화사한 옷을 좋아하는 여대생이다.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절, 앞서서 독재타도를 외치지는 못하는 경계의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재자의 아들이 운영하는 출판사에 취직을 해서 먹고 살게 되니, 이상과 현실은 더 간극이 심해진다. 쇠붙이로 무장한 전경들이 푸른 나무들 옆에 서 있던 시대를 다룬 소설에 어울리는 비유의 제목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p. 94
최후진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진실을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 최영미 시인의 다른 시집
2021.12.15 - [북리뷰/문학반] - [책]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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