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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2011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18~119
창문을 떠나며
지층이라는 주소에서 오래 살았다
창문 밖 감나무와 옆집 담쟁이덩굴
집으로 돌아올 때면 흐리멍텅해진 눈빛 같은 것이지만
밤늦게 시를 쓰려고 내다보면
그 눈 속에 차오르는 야생의 불꽃
창문에 가득하였다
가난이 있어
나는 지구의 이방인이었다
가로등의 불빛과 어둠에 섞인
두 그루의 식물이 영혼이었다
담쟁이덩굴은 기껏 옆집 난간을 타고
고작 2층에 머무르지만
지층의 창문에서 올려보면
언제까지나 야생의 울음으로 손짓했다
감나무의 이파리는 계절이 바뀌면
햇빛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바람을 느끼게 했다
나는 언제까지고 겸손한 무릎으로
지구를 찾아온 나무여야 하리라
현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 실상을 꿰뚫어 보려는 시선을 지녀야 하리라
지층의 창문에 왔다 간 것들
가령 구름을 향해 뻗어가는 담쟁이덩굴
찬 서리가 지층의 창문을 얼리고 있는
이사 가기 전날 밤
내 영혼은 어떤 나무로 다음 생에
지구에 서 있을 것인가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를 행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것이다
p. 128~129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빛이 내릴 때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빛이 내린다 비가 휙휙 내린다
한 걸음 뗄 때 사선으로 날리다가
소리 죽여 머리에 떨어지다가
찰칵찰칵 변두리 동네의 양철 지붕을 때린다
저녁 산책을 나온 중풍 걸린 노인과
골목의 커브에서 딱 마주친 날
한 걸음 뗄 때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따로 노는 두 다리와 허공에 쳐들린 두 손.
무아지경의 환희의 춤이 골목길에 환하다
비가 사방에서 뛰어온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가
엄마를 향해 까르륵 웃으며 달려가는 것처럼
간힌히 대지를 지탱하는 다리의 쾌감이
변두리 골목, 사방의 하늘에 번지고 있다
해가 비치지 않는 곳에서
사방에서 내리는 비는,
아기와 노인의 걸음마가 똑같아지는
쾌감의 순간이다 대초원의 소리처럼 비는
성대를 울리며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지나간다
중풍 걸린 노인이 지나간다
지팡이도 없이 노인이 걸을 때마다
해 진 뒤의 잔광처럼 골목길이 환하다
저쪽 커브 저편, 열려 있는 창문으로
빗소리를 듣고 있는 할머니
기다란 한숨이 나뭇잎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다
p. 136
투명한 울음
그런 날이 있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가는 여자가
차창에 떠 있는 자기 모습을 보고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그녀의 눈에 떠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운 적이 있다
그런 날에는 깨진 사금파리에 빛나는
시려운 빛이라도 그리워진다
p. 169
봄비
당신은 사는 것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게는 그 바닥을 받쳐줄 사랑이 부족했다. 봄비가 내리는데, 당신과 닭백숙을 만들어 먹던 겨울이 생각난다. 나를 위해 닭의 내장 안에 쌀을 넣고 꿰매던 모습. 나의 빈자리 한 땀 한 땀 깁는 당신의 서툰 바느질. 그 겨울 저녁 후후 불어 먹던 실 달린 닭백숙.
p. 171
커튼처럼 사람을
나는 커튼처럼 사람을 보며 살았다
그 너머 어른대는 신비에 취하지 않으면
못 살 나그네처럼,
인천과 서울 사이
물에 어른거리는
변두리에 취해
지극한 쾌락도 없이
여자의 배에 눈썹을 떨구며
나도 모르는 사이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허물어져
담벼락에 기댄
깨진 거울 속에서
줄기 없는 꽃처럼 피어
p. 178~179
생각날 떄마다 울었다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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