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소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나에대한열정 2022. 9. 12.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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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읽다 보니, 어느새 이 책도 세 번째 읽는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삼국지를 읽었던 것처럼 이 책을 읽은 시기도 주기가 있다. 2000년대에 민음사 초판이 나왔을 때 한 번, 2010년대에 독서모임에서 한 번, 그리고 올해. 문예출판사에서 에디터스 컬렉션으로 나온 2022년에 다시 한번. 그런데, 이번에는 유독 그 느낌이 다르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라는 자리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 뒤라서 그럴 것이다. "그 사람 아버지가 잘못이었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마담의 한마디. 이것이 이번에는 요조의 첫 번째 수기의 첫 문장(부끄러운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보다 더 강렬했다. 

 

요조의 수기는 10대 중 후반부터 20대 중 후반에 걸쳐 3편의 글이 나온다. 책을 읽는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인하여, 사실 그의 나이를 잊고서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충분히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인물로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막상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이 소설을 다시 접하게 되면, 아버지의 잘못이 맞다. 적어도 분명, "그를 눈여겨 지켜봐 줘야 했을" 어른들의 잘못이 맞다. 정말 내 속을 다 들여다보여줘도 괜찮은 사람이 있었다면, 삶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도 때로는, 나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곤 한다. 요조는 그 가면이 너무 많았을 뿐이고, 벗지 못했을 뿐이다. 그 속의 요조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신께 묻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p. 130)... 순진한 신뢰는 죄입니까?(p.132)

신께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인가요?(p.146)

 

 

p. 24~25
인간에게 호소한다. 나는 그런 소통 수단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께 말을 해도, 어머니께 일러도, 주위 사람들에게 청해봐도, 정부에 탄원해도, 결국엔 남의 얘기 좋아하는 사람의 화젯거리로 널리 퍼져나가지 않을까.
틀림없이 편파적인 부분이 있을 건 뻔한데, 결국 인간에게 호소하는 건 소용없는 짓이다. 내겐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가슴속에 묻혀둔 채 다시 '우스운 행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 외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p. 26
하지만 이 정도는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믿을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어느 쪽도 어떤 상처도 남기지 않아 겉으로는 전혀 표가 나지 않고 서로 속이고 있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기막히게 완벽한, 그야말로 결백하고 명랑한 불신의 사례들이 인간 생활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p. 40
인간에게 공포심이 심한 사람들은 오히려 무서운 요괴의 모습을 확실히 두 눈으로 보고자 하는 심리가 있고, 남들의 신경질에 다치기 쉬운 사람일수록 차라리 폭풍우가 강력하게 몰아치기를 기도하는 심리가 있는 법이다. 아아, 이런 부류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괴물에게 상처를 입고 인간들의 협박에 몰린 끝에 결국 환영을 믿게 되어 대낮에 자연 속에서 요괴의 모습을 생생히 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우습게 표현해 타인을 속이지 않고 본 그대로 그림에 표현하려고 노력해서, 다케이치가 말한 대로 엄연히 '도깨비 그림'을 그려냈으니, 여기에 장래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p. 52
뻔한 일이겠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원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이 있고, 욕심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허영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색色과 욕慾을 나란히 두자니 좀 그런데, 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인간 세계의 밑바닥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불가사의하고 괴기스러운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그 괴기스러움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나는 예의 유물론을, 물이 아래로 향하듯 자연스럽게 긍정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거나 그들이 제시하는 청사진에 눈을 떠 희망으로 부풀 수도 없었습니다. 

 

 

p. 66
겁쟁이는 행복조차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목화솜에도 상처를 입습니다. 행복에 상처 입을 수도 있는 겁니다. 상처받기 전에 빨리, 이대로 헤어지고 싶다는 초조감에서 예의 '우스운 행동'으로 연막을 친 겁니다. 

 

 

p. 99~100
나는 신조차 두려워했습니다. 신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신이 내릴 벌만을 굳게 믿었습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신의 채찍을 받기 위해서 심판대를 향하여 무릎 꿇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어도 천국의 존재는 아무리 애써도 내겐 보이지 않았습니다.

 

 

p. 101~102
아아, 인간은 서로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거나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양 평생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상대가 죽으면 눈물 흘리며 조문 따위를 읊어대는 것 아닐까요.

 

 

p. 107~108
세상, 나도 이제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싸움에서, 바로 그 자리의 싸움에서, 거기서 이기면 되고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존재로 노예조차 노예 나름의 비굴한 앙갚음을 하는 법이니 인간에겐 '단판 승부'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는 생존해나갈 길이 없고, 대의명분 따위를 내걸고 이루고자 노력한 목표는 반드시 개인으로 귀결되고, 개인을 딛고 일어선 다음에도 다시 개인을 향하므로 세상의 불가사의는 개인의 불가사의고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을 말한다는 관념을 갖고 나니, 난 세상이라는 큰 바다의 환영을 두려워하는 버릇에서 약간은 해방되어, 이전만큼 이것저것 오만 가지 일에 걱정하는 일 없이, 눈앞에 닥친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는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익히게 됐습니다.

 

 

p. 145~146
이제 나는 죄인이 아니라 광인이 된 겁니다. 아니, 난 결코 돌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광인은 대개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지요. 다시 말하면 이 병원에 수감된 자들은 미친 사람이고 들어오지 않은 자들은 정상이라는 말이 됩니다.
신께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인가요?
호리키의 이상할 만큼 다정한 미소에 나는 눈물을 흘리고, 판단도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자동차에 실려 이곳으로 끌려와서 광인의 신세가 됐습니다. 이제 여기서 나가더라도 나는 그래 봤자 광인, 아니 폐인으로 낙인찍히겠죠.
인간, 실격.
이제, 난,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됐습니다.

 

 

p. 148~149
이젠 내겐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이른바 '인간' 세상에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

 

 

 

(이 글은 문예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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