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만 해도 이맘때가 되면 자몽, 라임, 레몬, 생강, 대추, 배, 키위 등을 두세 박스씩 사서 하루 종일 앉아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냥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 해를 마무리라도 하듯이 그렇게 연례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담을 병들을 사서, 그냥 주위에 의미 없이 나눠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맙게도 내게 현타가 왔다.(혹시나, 현타를 정확히 인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친절한 나열정씨가 되어본다. 현타는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현자타임의 준말로, 여기서 현자는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 다음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보통 욕구에서 벗어난 무념무상의 경지에 있는, 해탈의 경지에 오른 느낌이 들 때 쓰는 표현이다. 다른 하나는 현실자각타임의 준말로,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있다가 현실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그래서 보통 회의감이나 허망한 느낌이 들 때 쓰는 표현이다. 물론 나의 현타는 후자다.)
내가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서 노동을 하던 이유는, 바로 가을을 타고 있는 있는 것이었다. 무언가 허한 느낌. 그런데 무엇으로도 충족이 안되는 그런 기분.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칼질을 했던 것이다. 이유를 알고 나서는, 나를 위한 분량 정도만 만들기로 했다. 물론,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따로 더 만드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말이다.
며칠 전에 자몽청과 라임청을 만들었다. 자몽과 키위 같은 경우는 다른 수제청들과는 다르게, 만들고 빠른 시일 내에 먹는 게 신선하고 맛있다. 다른 것들은 숙성기간이 조금 필요하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이제 가을을 타기 시작하나 생각됐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은 정말 마음이 으슬으슬하다. 다른 것들을 숙성시킬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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