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20

[시] [공항철도] 최영미 시집

최영미 2021 최영미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0~11 너무 늦은 첫눈 세검정에서 시작해 서교동의 카페에서 멈춘 첫눈 나에게만 보이는 눈 나에게만 보이는 너 나에게만 보이는 그 남자의 뒷모습 나에게만 빛나는 사람 다시 오지 않을 인생의 한때를 빗자루로 쓸고 있다 그는 알까? 그토록 쉬웠던 우리의 시작 그렇게 오래 연습한 마지막 돌아서면 사라질 너 없이도 아름다운 풍경을 쓸며 살아있다 펄펄 하얀 종이 위에 p. 27 진실 사람들에게 진실을 들으려면 어린애처럼 바보처럼 보여라 무릇 인간은 술 취했을 때, 그리고 어린애 앞에서 솔직해지거든 p. 36 운수 좋은 날 단골식당에 12시 전에 도착해 번호표 없이 점심을 먹고 서비스로 나온 생선전에 가시가 하나도 없고 파란불이 깜박이는 동안 횡단보도를 무사히..

북리뷰/문학반 2022.03.09

[시]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장수양 시집

장수양 2021 장수양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20~21 연말상영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극장에서는 그래. 스크린 향이 있다는 걸 아니. 기묘한 냄새야. 우린 쿠션달린 의자가 아니라 계단에 꿇어앉아 있는 것 같아. 한 칸씩 낮아지거나 높아지면서. 누군가는 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아래 있는 머리들은 볼링공처럼 보이네. 밀어내면 멀리 굴러가버리는 것들. 엔딩크레디트가 끝없이 올라가는 티셔츠를 입고 싶어. 영사기의 불빛을 내 목젖과 눈꺼풀 위까지 쐬어도 좋다. 이상하지. 불 꺼진 거리에서 너의 이름을 읽는 일은 왜 언제나 어려울까. 너는 어두울수록 맑아지는 게 있다고 했지만 나는 컴컴한 공간에서 매번 어리숙했다. 숨쉬는 걸 잊어버려서. 나중에는 귓가에 다른 사람의 숨소리가 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북리뷰/문학반 2022.03.08

[시] [무구함과 소보로] 임지은 시집

임지은 2019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50 느낌의 문제 느낌은 내 앞에 남자처럼 앉아 있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오른손 위에 왼손을 올리고 느낌이 말하고 움직이는 걸 본다 느낌에게 잘 보이고 싶어 목이 마르다 느낌은 컵에 담긴 물보다 차갑다 느리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맛이다 느낌은 하얀 탁자 위에 물을 엎질렀다 물이 탁자를 적시는 동안 느낌은 더욱 진해졌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거리를 까맣게 물들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이 전부인 거리를 걸어갔을 뿐인데 이 시간에 아직 문 연 가게가 있어요,라며 들어왔을 뿐인데 물 한 잔이 우리 앞에 놓였고 우리를 적셨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을 뿐인데 아마 이 느낌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p. 62~63 궁금 나무 궁금함은 나뭇가..

북리뷰/문학반 2022.03.05

[시] [찬란] 이병률 시집

이병률 2010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9~11 기억의 집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억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고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고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

북리뷰/문학반 2022.03.03

[시] [내가 모르는 한 사람] 문성해 시집

문성해 2020 유랑: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님 p. 17~18 나의 거룩 이 다섯 평의 방 안에서 콧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 대며 자는 어린 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 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속으로 쐐애 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 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가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날 듯 바닥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 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 마리에 칠..

북리뷰/문학반 2022.03.01

[시] [말끝에 매달린 심장] 이지호 시집

이지호 2017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3 신기루 어떤 풍경은 제 몸피를 기억하지 못한다 검은 눈동자만을 향해 조각조각 자르는 배경으로 만나는 옆과 옆 검은 곳에서 한 생명이 흘러내린다 염분으로 절여져 얌전한 숨결 뒤척이는 두 겹에 맺히는 함께하자는 말 눈은 불현듯 비어 가고 물음표를 던진다 p. 30~31 한계령풀 한해살이 여러해살이 풀을 가르는 말은 계절이 아닌데 간절함 속에서 풀이 흔들리며 피면 어느새 산에서는 한 계절이 조립된다 뒤울림에 따라 꽃이 되고 풀이 되는 이름 숲이 되지 못하는 기록되지 않은 물의 시간은 계약직이다 출근했던 공장의 소리가 들리는 산 푸른 교대를 마친 침엽수들이 깊숙한 곳으로 물러앉을 시간이다 흔들림으로 모든 꽃과 열매는 만근에 다다른다는데 근근이 버티고 있는 언니..

북리뷰/문학반 2022.02.26

[시] [아슬하게 맹목적인 나날] 고은진주 시집

고은진주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손목 손목은 어떤 상징인가 최후의 결심이 생채기 내는 곳이거나 톡톡 뛰는 압력을 움켜쥔 손으로 보내는 곳 안으로 접으면 드러나는 몇 줄 골 깊은 주름 숨기고 있는 곳 마음 없이 끌려갔던 손목 그 경험 뿌리쳤던 손목 개인용 시간을 불러내는 곳 또는 소매 덧대고 걷어 올리던 곳 한 십 년쯤 된 가출이 돌아와 서성거리던 골목 어귀 같기도 하고 헛기침 등에 업고 가는 아버지의 뒷짐 같은 것 생의 박동이 또박또박한 지점 이쪽과 저쪽의 날씨 짚어주기도 한다 부질없이 걷어붙이다가 오해사기도 하고 철들면 여지없이 공손해지는 곳 손목 비틀리기 전까지 실토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손목으로 모이고 두 손목이 묶이면 발목까지 엉키는 자리 대체로 가늘어서 만만하..

북리뷰/문학반 2022.02.24

[시] [연애의 뒤편] 정찬일 시집

정찬일 2020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63~65 연애의 뒤편 뒷문을 연다. 뿌리 깊지 않은 하늘 끝이 붉게 물들어 있다. 비행운이 어지럽게 풀어지고 몸이 서쪽으로 기운다. 열하루 상현달이 떠 있다. 밟지 않고 오른 달의 아홉 계단을 내린다. 계단에 새겨진,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던 낡은 오토바이 소리 천 개의 시린 손을 가진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위로 가부좌를 튼 회색빛 구름 낮게 떠 흐른다. 등불이 먼저 켜지는 그림자 짙은 저층의 집들 표정 없던 서쪽 창문에 피가 돈다. 실어증 앓는 변압기가 침묵의 위쪽에 겨우 매달려 있다. 물 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아도 뒤란에 서 있는 나무는 침묵으로 제 키를 조금씩 키운다. 주름을 제 몸에 새김으로 나무들은 뿌리의 시간을 펼쳐 보인다. 주름보다 내 뒤편에 서..

북리뷰/문학반 2022.02.23

[시]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손진은 시집

손진은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1~12 허기 충전 수년째 성업 중인, 그 묘한 허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는 밥집이 내 일터 가까운 곳에 있다 '허기 충전'이란 상호를 내건 저 카운터의 흰머리 사낸 알고 있다는 걸까 한 끼의 식사 같은 거로는 원기가 충전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충전된 허기가 더 검게 빛난다는 걸 밤새 달빛이 어루만지다 간 알 같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근 지붕의 저 식당에는 아닌게 아니라 펄럭이던 검정 비닐에 구멍 뚫어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와 막걸릴 마시다 시비가 붙어 막 씩씩거리는 짧은 머리의 롱 패딩들 허기의 사촌쯤인 불만과 불만의 양아들뻘인 분노와 상처들이 연탄난로 위 주전자가 흘린 물방울처럼 따그르르, 츠잇츠잇 굴..

북리뷰/문학반 2022.02.22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시집

황동규 2003 황동규 2003 p. 13 어떤 나무 다시는 세상에 출몰하지 않으려고 배에 돌을 달고 물 속에 뛰어든 사람 그 중엔 밧줄 풀어져 막 풀어진 눈으로 세상 구경 다시 한 사람도 있다. 안부 궁금하다. 한 오백 년 살며 몇 차례 큰 수술하고 사람 머리보다 더 큰 돌덩이 여럿 배에 넣고 넉넉하게 서 있던 나무 제주 애월에선가 만난 팽나무. 그 몸으로 어디 뛰어들어도 되떠올라 어리둥절할 일 없으리. 어느 날 돌덩이들만 땅에 내려 어리둥절하리. p. 14 쨍한 사랑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북리뷰/문학반 202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