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155

[소설]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읽다 보니, 어느새 이 책도 세 번째 읽는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삼국지를 읽었던 것처럼 이 책을 읽은 시기도 주기가 있다. 2000년대에 민음사 초판이 나왔을 때 한 번, 2010년대에 독서모임에서 한 번, 그리고 올해. 문예출판사에서 에디터스 컬렉션으로 나온 2022년에 다시 한번. 그런데, 이번에는 유독 그 느낌이 다르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라는 자리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 뒤라서 그럴 것이다. "그 사람 아버지가 잘못이었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던 마담의 한마디. 이것이 이번에는 요조의 첫 번째 수기의 첫 문장(부끄러운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보다 더 강렬했다. 요조의 수기는 10대 중 후반부터 20대 중 후반에 걸쳐 3편의 글이 나온다. 책을 읽는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

북리뷰/문학반 2022.09.12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시몬 드 보부아르 이 글은 보부아르 본인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엄마에 대한, 그녀에 대한, 어쩌면 그 시대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엄마가 암으로 인해 병원에서 투병을 하게 되고, 돌아가신 조금 이후까지의 이야기에는 보부아르가 어렸을 때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엄마의 모습, 병이 진척되면서 보여지는 모습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 변화 등 현재에 과거의 상황들이 조금씩 소환되면서 글은 전개되고 있다. 경제권을 쥐고 있는 남편에게 공손하던 엄마는 그 상황이 자식들에게 넘어가자, 자식들에게 보이는 모습도 그렇게 된다. 어느 시대에나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일 수도 있으나, 보부아르에게 보여지는 엄마의 그런 모습은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낯설고 안타까웠을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둔 엄마와의 관계에서 보부아르는 ..

북리뷰/문학반 2022.09.10

[소설] 엠마뉘엘 베르네임 <그의 여자>

엠마뉘엘 베르네임 의사인 서른 살의 클레르.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가방을 가져다준 토마스 코바크라는 남자에게 끌리게 된다. 그는 이웃 건물의 재건축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건축가였다. 카페에서 몇 번의 만남 이후, 토마스는 연락도 없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토마스에게서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나가지만, 클레르가 들은 말은, 그에게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레르에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전보다 뜨거운 만남을 이어나간다. 토마스는 클레르의 집에 몇 시에 도착하든, 한 시간 십오 분을 머물렀다. 더 머무르는 경우는 없었다. 그를 만나면서, 클레르는 토마스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해 이것저것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클레르는 토마스와 관련된 물건들을 하..

북리뷰/문학반 2022.09.09

[소설] 임솔아 <최선의 삶>

임솔아 중학교 아이들이 주인공인 소설. 그러나 그 세계의 무게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만큼 무겁고, 외롭다. 차라리 그 무게들을 대놓고 드러낼 수 있었다면, 그들은 조금 더 밝은 곳으로 갈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삶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었을까. 결말부분이 아쉬웠다. (나 스스로) 해결책도 내놓지 못할거면서, 그러면서도 아쉬웠다. 안타까웠다. 그게 최선이었다고, 원망조차 하지 않는 시선이, 마음이 속상했다. 아이들의 문제는 어른들의 그것보다 늘 어렵다. 어떤 광고의 문구처럼 그들의 세계를 방관하면 그들이 가게 되는 어른들의 세계 또한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 청소년 범죄가 사회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을 때, 정의라는 측면보다 그 아이들의 인권을 그리고 변화를 위해 일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

북리뷰/문학반 2022.09.08

[소설] 토레 렌베르그 <톨락의 아내>

토레 렌베르그 잉에보르그의 남자로 불리던 존재, 톨락.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톨락이다. 소설의 제목으로 봤을 때 라고 되어 있어서 아내가 주인공인듯하지만, 표지에 써있는 Tollak til Ingeborg 를 보면 till은 노르웨이어로 소속을 나타내서 "잉에보르그의 톨락"인 것을 볼 수 있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 원제를 보기 이전에는 작가정신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임마뉘엘 베르네임의 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주인공은 분명 그 여자였는데, 상대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녀의 성향이나 정체성들을 더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였나 하는 느낌에서 말이다.) 첫문장: 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다. 악성종양으로 인해서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톨락은 자신이 살면서 감추어왔던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아들과 딸에게 집..

북리뷰/문학반 2022.09.05

[시] [마술 상점] 김신영 시집

김신영 2021 김신영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42~43 그때가 세상은 봄이다 살아온 마디만큼 응시가 깊어지고 당신을 그리워할 때가 되면 그때가 세상은 봄이다 새로워진 것이 하나둘 붉은 얼굴을 불러들이는 봄 얼굴 가득 들어찬 주름을 털어 내 나도 봄을 불러들인다 아린 기억이 만든 사랑도 봄이 되는 저녁 잊을 수 없어 두렵던 날도 봄빛을 담는다 두근거리는 저녁 사랑 하나 품어 몰래 간직한 바람, 숲, 안개가 봄빛이다 어딜 가나 당신이 있다 봄빛 나무 잔가지에서 눈을 반짝이고 무성한 이파리 속에도 당신이 있다 하얀 눈이 내려 덮인 산하에도 첫사랑 같은 문장이 스며 나무에 묶여둔 마음이 봄이 된다 인생이 어느 가시밭길을 갈지 모르나 연탄길 같은 다정을 키워보는 것 바람 부는 마음을 안고 걸어도 봄을 ..

북리뷰/문학반 2022.03.27

[시]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정한용 시집

정한용 2021 정한용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24~25 아무도 남지 않은 별에서 이틀 못 봐도 그립지 않은 당신, 두 해 못 만나도 보고 싶지 않은 당신, 이백 년 헤어지고도 하나도 아쉽지 않은 당신. 불편한 만남보다 격리된 소통이 더 편리하고 자연스런 불구의 시간들. 내일은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 아무도 그립지 않고 누구도 만날 수 없는 별에서 오로지 와이파이와 텔레파시의 기호들만 바쁘게 떠다닌다. 반죽처럼 부푼 우리 사랑은 폭탄이 되고 지워진 곳을 가득 채운 소리와 떨림과 냄새, 들숨과 날숨으로 주고받는 지독한 사랑의 바이러스들. 당신 어디에서 왔어? 이억 년을 뛰어넘어 배달된 카톡가 페북메시지가 우리 이마를 성스럽게 씻어준다.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젖은 구원처럼. p. 34~36 천..

북리뷰/문학반 2022.03.26

[시]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시집

이현승 2015 이현승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0~11 저글링 내 손은 두개뿐인데 잡아야 할 손은 여러개다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회전문 안에서 우리의 스텝은 배배 꼬이고 뒤엉킨다. 회전과 와류를 빠져나가지 못해 우리는 빨래처럼 잔뜩 뒤엉키며 물이 빠진다. 아무나 막 목을 조르고 싶다. 남을 웃길 수 있는 능력을 남에게 웃음거리가 됐다고 번역하면서 우리는 자존심이 상한다. 슬픔을 팔고 있다는 수치의 감정이 우리를 화나게 한다. 손안에 쥐고 있는 얼음처럼 차가움에서 시작해 뜨거움으로 가는 악수, 내 손은 두개뿐이지만 여러개의 손을 잡고 있다. 와류: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흐름, 또는 그런 흐름..

북리뷰/문학반 2022.03.19

[시]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김태형 시집

김태형 2020 김태형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28~29 왜행성 먼 하늘을 올려다보니 심장 한 쪽이 무너지고 있는 게 보인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아직 한 쪽의 심장이 남아 있다 남은 심장 한 쪽으로 돌이킬 것인가 그 힘으로 얼음덩어리와 운석들이 가득한 곳으로 저 암흑까지 조금 더 가 볼 것인가 선명하고 밝은 심장 한 쪽이 거대한 운석의 충돌 때문에 생긴 것이라니 남은 한 쪽의 심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했지만 정작 사라진 사람은 나였다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나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키려고 보이지 않아야만 했다 남은 심장 한 쪽에 얼어붙은 대평원이 없었다면 한 쪽의 심장마저 잃고야 말았을 것이다 궤도를 끊고서 떠돌다가 먼지가 되거나 파편이 되어 다시 돌이키려 ..

북리뷰/문학반 2022.03.18

[시]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집

이제니 2019 이제니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3 나무 식별하기 그 나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평생 제 뿌리를 보지 못하는 나무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눈과 그 귀와 그 입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밤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나는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밤과 나무는 같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밤이 스며들고 있었다. 너는 너와 내가 나아갈 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잎이 다르듯이, 줄기와 줄기가 다르듯이, 보이지 않는 너와 보이지 않는 내가 마주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북리뷰/문학반 2022.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