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166

[시]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집

이제니 2019 이제니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3 나무 식별하기 그 나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평생 제 뿌리를 보지 못하는 나무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눈과 그 귀와 그 입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밤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나는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밤과 나무는 같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밤이 스며들고 있었다. 너는 너와 내가 나아갈 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잎이 다르듯이, 줄기와 줄기가 다르듯이, 보이지 않는 너와 보이지 않는 내가 마주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북리뷰/문학반 2022.03.17

[시]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시집

박형준 2011 박형준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18~119 창문을 떠나며 지층이라는 주소에서 오래 살았다 창문 밖 감나무와 옆집 담쟁이덩굴 집으로 돌아올 때면 흐리멍텅해진 눈빛 같은 것이지만 밤늦게 시를 쓰려고 내다보면 그 눈 속에 차오르는 야생의 불꽃 창문에 가득하였다 가난이 있어 나는 지구의 이방인이었다 가로등의 불빛과 어둠에 섞인 두 그루의 식물이 영혼이었다 담쟁이덩굴은 기껏 옆집 난간을 타고 고작 2층에 머무르지만 지층의 창문에서 올려보면 언제까지나 야생의 울음으로 손짓했다 감나무의 이파리는 계절이 바뀌면 햇빛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바람을 느끼게 했다 나는 언제까지고 겸손한 무릎으로 지구를 찾아온 나무여야 하리라 현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 실상을 꿰뚫어 보려는 시선을 지녀야 ..

북리뷰/문학반 2022.03.16

[시] [오늘 밤에는 별 대신 그리움 하나] 채만희 시집

채만희 2020 채만희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2 바람에 관하여 바람을 쐬러 나간다고 하면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부는가 하겠지만 사실 바람은 부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지 날아다니다 보면 부딪치는 일이 많지 부딪칠수록 힘은 커지지 풀잎 같은 것들은 살랑거리지만 전선 같은 것들은 윙윙거리며 큰 소리를 내지 소리는 소리끼리 부딪쳐 오해의 조각들로 쪼개지지 이름도 제 각각이어서 해풍, 육풍, 골바람, 산바람, 높새바람으로 불리지만 이름도 날아간다는 것도 진실은 아니야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바람은 부딪치며 소리를 만드니까 타자를 매개로 은밀히 술렁거리는 소문처럼 어디로 뛸지도 몰라 그러다가 바람은 허공에 뜨고 말지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는 바람처럼 처음부터 나란 없었던 거지 그러니..

북리뷰/문학반 2022.03.15

[시] [상처적 체질] 류근 시집

류근 2010 慕月堂(모월당): 사모할 '모', 달 '월', 집 '당' 류근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2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獨酌(독작): 홀로 '독', 술 부을, 따를 '작' : 술을 따라 주거나 권하는 상대가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심 p. 14~15 법칙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

북리뷰/문학반 2022.03.14

[시]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시집

심보선 2011 심보선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34~35 텅 빈 우정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손이 무한정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우연에 대하여 먼 훗날 더 먼 훗날을 문득 떠올리게 될 것처럼 나는 대체로 무관심하답니다.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입으로 말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입술이 하염없이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신비로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날. 내일은 진동과 집중이 한꺼번에..

북리뷰/문학반 2022.03.12

[시] [귀를 씻다] 이선식 시집

이선식 2020 이선식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32~33 가난 당신 생각이 저렇게 두서없이 흩날려도 되는 것일까? 속절없이 또 눈발은 날리고 산골버스에서 내린 한 낯선 여인이 눈길을 걸어가네 한겨울 산간벽지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부귀영화보다 따사로운 호사 가난이 어찌 배고픔뿐이랴 나는 먼데 사람이 궁금해 손바닥으로 눈을 받아 눈점(卜)을 쳐 본다 손바닥에서 녹은 눈이 방울지면 그도 나를 생각하는 거라는 속설 가진 거라곤 적막뿐인 집에 산까마귀들이 내려와 왼종일 부산을 떨다 갔다 이내 뱀처럼 긴 밤이 와서 차갑게 식은 나를 삼키고 오래오래 뒤척일 것이다 속절없이 - 속절없다: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산간벽지: 산간 지대의 구석지고 후미진 산골(산간: 산과 산 사이에 산골짜기가 많은..

북리뷰/문학반 2022.03.11

[시]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박숙경 시집

박숙경 2021 박숙경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3 시(詩) 쓸모없이 자라는 오지랖과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는 외고집과 필요 이상의 변명과 이유를 잘라냈다 하얀 비명이 떨어진다 끈적한 울음이 손가락 사이사이 들러붙는다 손금이 뚜렷해지기까지는 얼마의 시간과 얼마의 햇빛이 필요한지 생명선이 길어질 때쯤 겨드랑이 밑으로 곁가지가 돋아난다 저, 눈물겨운 균형 자꾸 혼잣말이 늘어난다 p. 35 맛있는 소리 병아리 등에 내리는 봄 햇살 소리 어미 보채는 아기 제비 소리 석 잠 잔 누에 뽕잎 갉는 소리 그 소리 사이사이 소낙비 소리 사립문 여닫는 소리 아침을 끌고 오는 바람 소리 구름을 밀어 올리는 암자의 목탁 소리 청설모 지나간 뒤 꿀밤 떨어지는 소리 한 뼘씩 줄어드는 늦가을 햇볕 스러지는 소리 휘영청 달 그림..

북리뷰/문학반 2022.03.10

[시] [공항철도] 최영미 시집

최영미 2021 최영미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0~11 너무 늦은 첫눈 세검정에서 시작해 서교동의 카페에서 멈춘 첫눈 나에게만 보이는 눈 나에게만 보이는 너 나에게만 보이는 그 남자의 뒷모습 나에게만 빛나는 사람 다시 오지 않을 인생의 한때를 빗자루로 쓸고 있다 그는 알까? 그토록 쉬웠던 우리의 시작 그렇게 오래 연습한 마지막 돌아서면 사라질 너 없이도 아름다운 풍경을 쓸며 살아있다 펄펄 하얀 종이 위에 p. 27 진실 사람들에게 진실을 들으려면 어린애처럼 바보처럼 보여라 무릇 인간은 술 취했을 때, 그리고 어린애 앞에서 솔직해지거든 p. 36 운수 좋은 날 단골식당에 12시 전에 도착해 번호표 없이 점심을 먹고 서비스로 나온 생선전에 가시가 하나도 없고 파란불이 깜박이는 동안 횡단보도를 무사히..

북리뷰/문학반 2022.03.09

[시]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장수양 시집

장수양 2021 장수양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20~21 연말상영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극장에서는 그래. 스크린 향이 있다는 걸 아니. 기묘한 냄새야. 우린 쿠션달린 의자가 아니라 계단에 꿇어앉아 있는 것 같아. 한 칸씩 낮아지거나 높아지면서. 누군가는 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아래 있는 머리들은 볼링공처럼 보이네. 밀어내면 멀리 굴러가버리는 것들. 엔딩크레디트가 끝없이 올라가는 티셔츠를 입고 싶어. 영사기의 불빛을 내 목젖과 눈꺼풀 위까지 쐬어도 좋다. 이상하지. 불 꺼진 거리에서 너의 이름을 읽는 일은 왜 언제나 어려울까. 너는 어두울수록 맑아지는 게 있다고 했지만 나는 컴컴한 공간에서 매번 어리숙했다. 숨쉬는 걸 잊어버려서. 나중에는 귓가에 다른 사람의 숨소리가 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북리뷰/문학반 2022.03.08

[시] [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 김미령 시집

김미령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4~15 작용 거기 서! 하고 말했지만 계속 줄지어 가는 것들이 있다. 가고 있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말하기 전에 이미 다 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쪽 유리창에 김이 서린다. 굳이 세우려던 것이 아니라면 불러 볼 필요는 없지 않았냐고 누가 말하는 것 같다. 이리로 와! 하고 말했지만 역시 오지 않았고 대신 공이 이쪽으로 굴러왔다. 공에서 시선을 주는 동안 충분히 지나갔을까 생각했지만 아직 거기 있는 것은 미안해서라기보다 무엇을 할지 몰라서였고 언제든 생각나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올 것이지만 오지 않더라도 후회는 누구의 것도 아니겠지. 오지 말고 그냥 가!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뒤여서 그것이 방금 내가 한 말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는 사..

북리뷰/문학반 2022.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