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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아슬하게 맹목적인 나날] 고은진주 시집

고은진주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손목 손목은 어떤 상징인가 최후의 결심이 생채기 내는 곳이거나 톡톡 뛰는 압력을 움켜쥔 손으로 보내는 곳 안으로 접으면 드러나는 몇 줄 골 깊은 주름 숨기고 있는 곳 마음 없이 끌려갔던 손목 그 경험 뿌리쳤던 손목 개인용 시간을 불러내는 곳 또는 소매 덧대고 걷어 올리던 곳 한 십 년쯤 된 가출이 돌아와 서성거리던 골목 어귀 같기도 하고 헛기침 등에 업고 가는 아버지의 뒷짐 같은 것 생의 박동이 또박또박한 지점 이쪽과 저쪽의 날씨 짚어주기도 한다 부질없이 걷어붙이다가 오해사기도 하고 철들면 여지없이 공손해지는 곳 손목 비틀리기 전까지 실토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손목으로 모이고 두 손목이 묶이면 발목까지 엉키는 자리 대체로 가늘어서 만만하..

북리뷰/문학반 2022.02.24

[시] [연애의 뒤편] 정찬일 시집

정찬일 2020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63~65 연애의 뒤편 뒷문을 연다. 뿌리 깊지 않은 하늘 끝이 붉게 물들어 있다. 비행운이 어지럽게 풀어지고 몸이 서쪽으로 기운다. 열하루 상현달이 떠 있다. 밟지 않고 오른 달의 아홉 계단을 내린다. 계단에 새겨진,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던 낡은 오토바이 소리 천 개의 시린 손을 가진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위로 가부좌를 튼 회색빛 구름 낮게 떠 흐른다. 등불이 먼저 켜지는 그림자 짙은 저층의 집들 표정 없던 서쪽 창문에 피가 돈다. 실어증 앓는 변압기가 침묵의 위쪽에 겨우 매달려 있다. 물 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아도 뒤란에 서 있는 나무는 침묵으로 제 키를 조금씩 키운다. 주름을 제 몸에 새김으로 나무들은 뿌리의 시간을 펼쳐 보인다. 주름보다 내 뒤편에 서..

북리뷰/문학반 2022.02.23

[시]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손진은 시집

손진은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1~12 허기 충전 수년째 성업 중인, 그 묘한 허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는 밥집이 내 일터 가까운 곳에 있다 '허기 충전'이란 상호를 내건 저 카운터의 흰머리 사낸 알고 있다는 걸까 한 끼의 식사 같은 거로는 원기가 충전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충전된 허기가 더 검게 빛난다는 걸 밤새 달빛이 어루만지다 간 알 같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근 지붕의 저 식당에는 아닌게 아니라 펄럭이던 검정 비닐에 구멍 뚫어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와 막걸릴 마시다 시비가 붙어 막 씩씩거리는 짧은 머리의 롱 패딩들 허기의 사촌쯤인 불만과 불만의 양아들뻘인 분노와 상처들이 연탄난로 위 주전자가 흘린 물방울처럼 따그르르, 츠잇츠잇 굴..

북리뷰/문학반 2022.02.22

[추천도서] [백만장자 시크릿] Secrets of the Millionaire Mind 하브 에커, 부자 마인드의 필독서

추천도서 하브 에커 Secrets of the Millionaire Mind ★★★★★ 올해(2022년) 계획 중에 하나가 내 삶을 풍요롭게 할 책(동시에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물려줄 책) 100권을 선정해서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사고와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책들로만 구성하려고 한다. 문학작품은 제외되어 있다. 하브 에커의 이 그 첫번째 책이다. 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들 p. 20~21 배우는 것뿐 아니라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의 생각과 행동방식이 당신을 지금 이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지금 부자이고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좋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도구함에 잘못된 내용물이 들어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를테면 현재의 사고방식이 옳다거나 적합..

[일본소설] [기묘한 러브레터] 야도노 카호루, 기묘한 러브레터 결말 포함

야도노 카호루 책 표지 중간에 쓰여있는 일본어 원제는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이다. 내용상 러브레터는 아닌데... 왜 번역을 이렇게 한 것인지... 조금 더 생각할 수는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표지로 보나, 소설의 성향으로 보나 그다지 즐겨하는 부류의 소설은 아니다. 그런데 페북에 올라온 '놀라운 반전'이라는 누군가의 리뷰에, 거기에 달린 똑같은 반응들의 댓글에, 도대체 어떤 반전이 있을까 궁금해서 거의 글을 보자마자 책을 주문했다. 이 소설의 저자, 야도노 카호루는 아무런 정보를 알 수 없는 복면 작가이다. 전자책 부문에서 1위를 했다는 것, 그리고 이 소설의 내용이 친구의 경험담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이다. 의 줄거리(결말 포함) 이 소설은 미즈타..

북리뷰/문학반 2022.02.21

[시] [아껴 먹는 슬픔] 유종인 시집

유종인 2001 場(장): 마당 '장' 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 여러 가지 상품을 사고파는 일정한 장소. 罷場(파장):파할 '파', 마당 '장' 장이 파하는 것. 모임이 거의 끝남 生前(생전): 날 '생', 앞 '전' 死後(사후): 죽을 '사', 뒤 '후'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2 팝콘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칼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못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嘔吐(구토): 게우다, 토하..

북리뷰/문학반 2022.02.20

[시]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황인숙 시집

황인숙 2016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갱년기 이번 역은 6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삼각지역입니다 삼각지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으로 우르르 달려온다 열리는 출입문을 향해 사람들이 통로를 필사적으로 달려온다 다시는 오지 않을 열차라도 되는 양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이런, 이런, 그들을 살짝 피해 나는 건들건들 걷는다 건들건들 걷는데 6호선 승차장 가까이서 열차 들어오는 소리 어느새 내가 달리고 있다 누구 못잖게 서둘러 달리고 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런, 건들거리던 내 마음 이렇듯 초조하다니 놓쳐버리자, 저 열차! p. 55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하얗게 텅 하얗게 텅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북리뷰/문학반 2022.02.19

[시] [오늘 아침 단어] 유희경 시집, 영화 <좋아해줘>에서 최지우가 페이스북에 올린다고 사진 찍을 때 들고 있던 시집

유희경 2011 영화 에서 정성찬(김주역)의 코치를 받으며 함주란(최지우)이 페북에 올릴 사진을 찍는 장면중에 나오는 시집. p. 12~1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

북리뷰/문학반 2022.02.18

[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시집, 영화 <좋아해줘>에서 유아인이 들고 있던 시집

심보선 2008 영화 에서 조경아 작가(이미연)가 노진우(유아인)에게 "너의 길을 가라..."라는 글귀와 함께 선물했던 시집. 노진우(유아인)가 그 시집을 뒤적이다가 둘이 찍은 사진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시집이다.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8~19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잿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

북리뷰/문학반 2022.02.17

[시]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김진규 시집

김진규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7~19 몇 번의 계획 내가 없이도 너에게 소중한 것은 감은 눈 위로 아른거리는 햇빛 널 부르다 내가 머문 곳엔 아로새긴 우리의 이름처럼 선명하게 금이 간 유리잔 하나 너는 들판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눈에 담는다 부유하는 꽃씨들은 빨갛게 불타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본다 해가 지고 밤이 오면 우리는 가장 필요 없는 것들을 모아 불을 지펴야 하는데 몇 번의 계획을 모아 태워야 조금은 밝은 밤이 찾아올 텐데 우리가 손꼽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결국 혼자가 될 테고 어두운 하늘 속엔 검은 오리들 젖은 다리를 품에 꼭 감춘 채 황금빛 잉어들을 물고 날아간다 비늘 같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 우리는 이제 몇 번의 계획 속에서 또 어떤 것들을 가만히 담아두게 될까 또 어떤..

북리뷰/문학반 2022.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