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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신용목 시집

신용목 시집 2004 신용목 시집 2004 p. 20~21 우물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

북리뷰/문학반 2022.01.18

[세상의 모든 비밀] 이민하 시집

이민하 2015 이민하 2015 p. 26~27 휴일의 쇼 사람들은 휴일을 사랑하고 나도 휴일이 좋아 연중무휴 휴일이다. 일요일과 월요일의 철책을 없애고 빈방 같은 휴일이 쌓인다. 사람들은 빈방을 사랑하고 나도 빈방이 좋아 천지사방 빈방이다. 빈방마다 따끈한 철가방이 배달된다. 불어터진 햇발을 씹고 입가에 묻은 어둠의 소스를 훔치면 낯선 시간 속으로 지금 막 이사 온 기분. 뼈를 끌러 내장이라도 쏟고 윤이 나도록 닦으면 처박혀 있던 핏물이 엎질러져 물걸레를 짜듯 째지는 기분. 사람들은 휴일에는 더욱 바쁘고 나도 휴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쉬지 않고 지껄인다. 사람들은 빈방에서 더욱 요란하고 나도 빈방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럴듯하게 꾸며댄다. 욕실을 해변처럼 꾸미고 거실을 동물원처럼 꾸미고 책장에는 ..

북리뷰/문학반 2022.01.18

[다른 시간, 다른 배열] 이성미 시집

이성미 2020 이성미 2020 시인 이성미는 2001년 에 '나는 쓴다'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 이 있다. 제5회 시로 여는 세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p. 20~21 접힌 하루 하루가 접혀 있었다.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걸었던 것이다. 토요일은 접힌 종이 속에 있었다. 땅 밑에 녹색 어둠이. 어둡고 기름진 흙에서 검은 식물들이 자랐다. 종이 사이에. 하루가 있었다. 금요일 아침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금요일 아침을 책상 위에 둔 채 책상 앞을 떠났다. 걸었다. 딴생각을 했을 것이고, 딴 곳을 걸었을 것이다. 일요일 오후의 희미한 공기들이 나를 둘러쌌다. 나무에는 일요일 오후의 잎들이. 잎들에는 일요일 오후의 햇빛이. 일요일 오후의 바람이 잎들을 흔들었다. 일요일의..

북리뷰/문학반 2022.01.16

황동규 [꽃의 고요], 황동규 시집

황동규 시집 2006 황동규 시집 2006 p. 17 연필화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입으리. p. 27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p. 45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

북리뷰/문학반 2022.01.15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시집

이영주 2019 이영주 2019 이영주 시인은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시집 , , 이 있다. p. 16~17 기념일 사라진 나를 찾고 있던 시간, 물줄기처럼 기후가 흘러간다. 아무도 머물지 않고, 나도 있지 않다. 만질 수 있고 만져지지 않는 물질, 따듯한 그릇 안의 곰팡이, 투명한 구름에서 떨어지는 입자를 잡는 긴 판 같은 것. 기후는 틈으로 움직인다. 어디에도 없는 나는 길어지는 팔, 나를 안고 나를 밀어내느라 팔은 점점 더 가늘어진다. 한겨울 폴란드에 있다. 폴란드 그릇 안에서 번식하고 있다. 불행하게 죽은 영혼은 모든 기억을 씻어버리는 물을 마시고 깨끗해진다는데, 나는 그릇을 엎질렀어! 시큼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벽 틈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있다. 우리의..

북리뷰/문학반 2022.01.14

최재원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최재원 2021 최재원 2021 제40회(2021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최재원 시인은 민족사관고를 나와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물리학과 시각예술을 전공했고, 럿거스대 메이슨 그로스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그렸다. 2019년 시 전문 계간지 '사이펀'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2018년 미국의 예술 웹진에 미술비평을 기고하며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 천상병 시인의 '주막에서'를 영어로 번역했고, 그 이후로 여러 시를 번역하면서 자신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목의 맞춤법에 대한 반응에서 시인은 "표준어 밖의 언어로 존재하는 경험과 표현, 사람이 많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며 합의된 논리와 시스템 밖에서 깎여 나가는 것은 무엇인가에 주목하고 싶었다"라고 한다.(경향신문 인터뷰) 유일하게 하나 옮겨..

북리뷰/문학반 2022.01.13

황동규 [사는 기쁨]

황동규 2013 황동규 2013 p. 9 이별 없는 시대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어 갈라지겠는가? 허허. p. 30~33 영원은 어디? 때아닌 추위 강습. 오리털 점퍼 끄집어내 덧입고 나선 산책길 길섶 누른 풀은 눈 맞고 얼어 풀떡 범벅되었고 아직 땅에 내려오지 못한 졸참나무 잎새들이 머리 위에서 쓰렁쓰렁 귀 시린 발성을 한다. 너는 지금 네 추위 속을 걷고 있어. 언덕을 넘자 서리 허옇..

북리뷰/문학반 2022.01.12

최승자 [즐거운 일기]

최승자 1984 최승자 1984 p. 33~34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

북리뷰/문학반 2022.01.11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김사인 p. 10~11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 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붇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곁으로 나비나 별이나 별로 고을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이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북리뷰/문학반 2022.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