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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의 봄] 황동규 시집

황동규 2016 황동규 2016 p. 11 그믐밤 여행 도중 받은 아끼던 제자의 부음. 벌써 가는 나인가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이나 보자꾸나, 민박집 나와 언덕을 오를 때 휴대폰 전짓불이 나갔다. 냄새로 달맞이꽃 무리를 거쳐 반딧불이만 몇 날아다니는 관목 덤불을 지났다. 빛이 다가오는가 했더니 물소리였다. 불빛 낮춘 조그만 방같이 환(幻)한 여울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환(幻): 변할 '환' p. 16~17 살 것 같다 49일간 하늘이 이리 찌푸리고 저리 찌푸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간(眉間)을 펴고 오..

북리뷰/문학반 2022.01.26

[사랑은 우르르 꿀꿀] 장수진 시집

장수진 2017 장수진 2017 시인 장수진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했다. 2012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p. 16~17 극야(極夜) 신은 밤새도록 악마와 당구를 치고 잘못 맞은 적구가 당구대 밖으로 튀어 오르면 도시에 태양이 뜬다 딩···딩··· 악마는 발가락을 까딱이며 알람을 울리고 두 팔을 길게 뻗어 잠이 덜 깬 자의 발에 구두를 신겨준다 우리는 걷고 또 걷고 사고팔고 사랑하고 오해하고 추락하고 추억하고 두 노인네는 낮의 당구장에 죽치고 앉아 끝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악마가 이름을 부르면 누군가 태어났고 신이 그 이름을 까먹으면 누군가 사라졌다 그들은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먹은 밥을 먹고 또 먹었다 집에 간다며 악수하고 헤어진 신과 ..

북리뷰/문학반 2022.01.25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에리카 산체스 2022 I AM NOT YOUR PERFECT MEXICAN DAUGHTER 에리카 산체스 2022 완벽한 멕시코 딸은 대학에 가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부모님과 함께 산다. 결코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엄마 아빠의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다. 그것은 내 언니, 올가의 역할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훌리아 레예스는 15세에서 16세로 막 넘어가는 시기의 소녀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멕시코에서 시카고로 밀입국한 불법체류자들이고, 엄마는 남의 집 일을 하고, 아빠는 사탕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누가 봐도 아주 모범적인 딸, 올가(훌리아의 언니)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올가의 차가 브레이크 수리를 위해서 카센터에 맡겨지고, 버스로 출근을 하는데, 나중에 엄마가 데..

북리뷰/문학반 2022.01.24

[황금빛 모서리] 김중식 시집

김중식 1993 김중식 1993 p. 34~35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한 여인의 첫인상이 한 사내의 생을 낙인찍었다 서로 비껴가는 지하철 창문 그 이후로 한 여인은 한 사내의 전세계가 되었다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생겼다 세계는 한없이 길고 어두웠으나 잠깐씩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웃을 때는 입이 찢어지고 울 때는 눈이 퉁퉁 붓던 한 사내 그러나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표정의 억양이 문드러지고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어졌다. 과연 일부러, 도대체 일부러 한 여인이 한 사내의 세계를 무너뜨렸겠는가 자기도 어쩔수 없이,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그런 말을 믿는다면 우리..

북리뷰/문학반 2022.01.23

[낙타] 신경림 시집

신경림 2008 신경림 2008 p. 10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p. 13 고목을 보며 그 많던 꿈이 다 상처가 되었을 게다 여름 겨울 없이 자기를 흔들던 세찬 바람도 밤이면 찾아와 온몸을 간질이던 자디잔 별들도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게다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 꽃보다도 또..

북리뷰/문학반 2022.01.22

[산책하는 사람에게] 안태운 시집

안태운 2020 안태운 2020 시인 안태운, 1986년 전주 출생. 201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이 있다. 제35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p. 14 목소리 풍경 소리가 들립니까. 바람이 불었는지. 아니면 무언가 부딪쳤는지. 너는 그곳을 바라보았는데 풍경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너는 풍경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다시 바람이 불기 전에. 무언가 부딪치기 전에 사람을 찾아야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런 일도. 풍경 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았고, 그러므로 너는 손가락으로 풍경을 건드려보지만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는군요. 소리가 없군요. 너는 네 목소리를 내봅니다. 네 목소리를. 입술을 동그랗..

북리뷰/문학반 2022.01.21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집

박준 2018 박준 2018 p. 9 선잠 그 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p. 27 낮과 밤 강변의 새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떠나는 일이었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답으로 돌아왔다 동네 공터에도 늦은 눈이 내린다 p. 31 묵호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북리뷰/문학반 2022.01.20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시집

황동규 2003 황동규 2003 p. 13 어떤 나무 다시는 세상에 출몰하지 않으려고 배에 돌을 달고 물 속에 뛰어든 사람 그 중엔 밧줄 풀어져 막 풀어진 눈으로 세상 구경 다시 한 사람도 있다. 안부 궁금하다. 한 오백 년 살며 몇 차례 큰 수술하고 사람 머리보다 더 큰 돌덩이 여럿 배에 넣고 넉넉하게 서 있던 나무 제주 애월에선가 만난 팽나무. 그 몸으로 어디 뛰어들어도 되떠올라 어리둥절할 일 없으리. 어느 날 돌덩이들만 땅에 내려 어리둥절하리. p. 14 쨍한 사랑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북리뷰/문학반 2022.01.19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신용목 시집

신용목 시집 2004 신용목 시집 2004 p. 20~21 우물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

북리뷰/문학반 2022.01.18

[세상의 모든 비밀] 이민하 시집

이민하 2015 이민하 2015 p. 26~27 휴일의 쇼 사람들은 휴일을 사랑하고 나도 휴일이 좋아 연중무휴 휴일이다. 일요일과 월요일의 철책을 없애고 빈방 같은 휴일이 쌓인다. 사람들은 빈방을 사랑하고 나도 빈방이 좋아 천지사방 빈방이다. 빈방마다 따끈한 철가방이 배달된다. 불어터진 햇발을 씹고 입가에 묻은 어둠의 소스를 훔치면 낯선 시간 속으로 지금 막 이사 온 기분. 뼈를 끌러 내장이라도 쏟고 윤이 나도록 닦으면 처박혀 있던 핏물이 엎질러져 물걸레를 짜듯 째지는 기분. 사람들은 휴일에는 더욱 바쁘고 나도 휴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쉬지 않고 지껄인다. 사람들은 빈방에서 더욱 요란하고 나도 빈방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럴듯하게 꾸며댄다. 욕실을 해변처럼 꾸미고 거실을 동물원처럼 꾸미고 책장에는 ..

북리뷰/문학반 2022.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