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166

[책]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94년도에 최영미 시인의 를 보면서, '시'라는 존재가 멋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했었다. 같은 책을 열 권이 넘게 산 것도 내게는 유일할 것이다. 좋아하는 친구들에게는 한 권씩 권냈으니. 마치 내가 쓰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손때 묻은 초판본은 어디로 간 건지. 개정판을 또다시 사서 본다. 최영미 시인의 표현대로 투명한 것이 나를 취하게 하던 그런 시기에, 난 그녀의 시들이 너무 좋았다. 세월이 흘러도, 계속 보아도, 좋은 걸 보니, 그때의 내 안목도 나쁘지 않았나보다. 아니면 시들이 너무나 내 스타일이든지. 생각 같아서는,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다 옮겨 써놓고 싶다. 그러면 안 되겠지. 차라리 시집을 다시 돌릴까. p. 10~11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북리뷰/문학반 2021.12.15

[책]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시집 p. 12~13 나비의 겨울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누군가 내 집에 있다 갔다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누군가는 내 집에 살다 갔는데 나는 집이 싫어 오래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 번 기웃거렸다 누군가 다녀간 온기로 보아 어쩌면 둘이거나 셋이었을지도 모를 정겨운 흔적 역력하고 문이 그대로 잠긴 걸 보면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서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

북리뷰/문학반 2021.12.10

[책]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시집 p. 58~59 호수 호수 위 작은 배 하나 마주 앉아 기도를 마치고 부둥켜안는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끌어안았던 팔을 풀자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배는 흔들리고 다른 한 사람도 놀라 일어나자 위태롭게 다시 배가 휘청였습니다 먼저 일어난 한 사람이 물로 뛰어들더니 헤엄을 쳐서 배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멍이 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멍이 나가는 관계가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첫 별은 잠시 후면 이 호수에 당도해 홀로 남은 채로 멍이 퍼지고 있는 한 사람을 끌어줄 것 입니다 호수 위에 작은 배 하나 고요밖에는 아무 일도 없는데 푸드덕 물새가 날아오릅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꽃이 피고 피는 건 꽃도 어쩌지 못해서랍니다 p. 60~61 새 자면서 누구나 하루에 몇 번을 뒤척입니다 내가 뒤척일 적마다 누군..

북리뷰/문학반 2021.12.09

[책] 임경선 산문 <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산문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한 친구가 이 책의 한 구절을 읽어줬다. 그 부분에 끌려 책을 구매했는데, 구매할 때 드는 생각은 이렇게 시집처럼 얇은 책을 왜 이리 비싸게 판매하는가였고,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남의 가정을 엿본 느낌이었다. 심지어 내가 끌린 대목은 이 사람의 글이 아니라 인용문이었다...... 아놔...... 물론 읽는 동안, 재미는 있었다. 가볍게, 아주 가볍게 말이다. 대체 누가 결혼생활을 '안정'의 상징처럼 묘사하는가. 결혼이란 오히려 '불안정'의 상징이어야 마땅하다. p. 11 작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하지현 선생님이 한 번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작은 단점 열 가지에도 내가 그 사람을 견디고 여전히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북리뷰/문학반 2021.11.29

[책]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구병모 이 소설은 그림 형제의 을 모티브로 한다.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의 집에서 밤마다 그들을 위해서 구두 만드는 것을 도와주던 존재들은,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는 구두장이 부부의 삶을 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구두장이는 길드에 정식으로 가입된 기쁨으로 그 존재들에게 옷과 구두를 선물로 작업대 위에 놔두게 되는데, 그 존재들은 그 선물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옷을 나눠 입고 신발을 나눠신더니, 바늘을 내려놓고 노래 부르며 구두장이 부부의 집을 떠난다. 수제구두 공방을 하며 살고 있는 안이라는 남자가 있다. 모든 공정을 혼자 처리하는 관계로 수제화 한 켤레를 만드는데 한 달 이상이 걸려서, 분기별로 공방교실을 열어서 경제적인 부분을 충당하고 있다. 구두 관련 블로그가 있기는 하지만, 글도 얼마 있지..

북리뷰/문학반 2021.10.14

[책] 니콜라이 고골 <코>

니콜라이 고골 中 "코" 니콜라이 고골(1809~1852) 고골은 1809년 우크라이나의 미르고로드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당시에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병합되어 있던 시기라서, 1990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각국이 서로 자기들 국가의 작가라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태생이니 우크라이나 작가라는 것과 대부분의 생활을 러시아 쪽에서 했으며 작품도 러시아어로 썼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 작가라고 말이다. 고골은 1831년 첫 소설집으로 를 발표한다. 소설집의 제목에 있는 '디칸카'는 실제 우크라이나 폴타바주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당시 낭만주의 사조가 유행하고,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의 변방 쪽이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의 이야기가 나름 이국적인 정서를 느끼게 해 주었고, 그로 인..

북리뷰/문학반 2021.09.17

[책] 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The Noise of Time 책을 사놓고 책장에 있다는 거 조차 잊어버렸던 책이다. 아마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책인지 알았다면 바로 보았을 텐데 말이지.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 산 책인데, 한 번에 한 권을 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책을 샀을 때 바로 손에 잡지 않으면 이런 경우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종종 책장들의 제목들을 둘러보는 습관도 생겼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리 두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도중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찾아서 들어야했고, 어느새 조지 오웰의 1984에 빠져있었고,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손수건 사이에 치약을 짜서 최루탄가스의 매움과 메스꺼움을 막아야 했던 시절, 신나게 고무줄놀이를 하다가도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북리뷰/문학반 2021.08.12

[책] 레오 페루츠 <심판의 날의 거장>

레오 페루츠 첫 문장: 나의 작업은 끝났다. 나는 1909년 가을에 있었던 일들, 연달아 일어난 비극적 사건들을 적어 놓았다. 그 사건들과 나는 아주 기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기록한 것은 완전한 진실이다. 아무것도 건너뛰지 않았고, 아무것도 억누르지 않았다. 그럴 까닭이 뭐가 있겠는가? 나에게는 무언가를 숨길 이유가 없다. 1909년 가을. 고르스키 박사는 궁정 배우 비쇼프의 저택에서 실내악 연주나 한번 하자면서 나(요슈 남작)를 찾아온다. 그들은 각자 첼로와 바이올린을 들고 오이겐 비쇼프의 집으로 간다. 연주가 한창일 때, 비쇼프의 집에 펠릭스(비쇼프의 처남)의 동료인 엔지니어 발데마르 졸그루프가 찾아온다. 그들은 한참 음악과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다가 비쇼프한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

북리뷰/문학반 2021.07.28

[책]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2021) "베네수엘라 같은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민주주의적인 것이 배고픔과 죽음이었다."라고 말한 베네수엘라 기자 출신인 작가. 2019년 에서 가장 창의적인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 공황 이후 현재 베네수엘라의 참상을 그려낸 작가의 첫 소설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루멘 출판사와 계약 직후 22개국으로 판권이 팔릴 만큼 스페인어권 문학 사상 전례 없는 주목을 받은 소설이고, 곧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소설로 들어가 보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서른여덟의 여자.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아델라이다 팔콘. 이 이름은 그녀 엄마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녀 자신의 이름..

북리뷰/문학반 2021.07.23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1935~2004)은 이 소설을 24살에 썼다. 몇 살에 이 소설을 썼는지 굳이 쓰는 이유는 어떻게 그 나이에 마흔을 바라보는 여자(이 소설의 주인공)의 느낌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는지...... 이미 1954년, 18세의 나이로 을 발표하자마자 비평가상을 받음으로써 프랑스 문단의 대표 신인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비평가 상의 상금이 10만 프랑이었는데, 사강은 미성년이라 통장거래를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전부 현금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로 재규어 XK 140을 구입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지만, 버스에서 우는 것보다는 재규어에서 우는 게 더 낫다."라는 말을 그냥 할 수 있는 게 ..

북리뷰/문학반 202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