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209

[시] [그대에게 넝쿨지다] 임두고 시집

임두고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잎이 건네는 말 위내시경을 들이밀고 한 두어 달 속병을 앓았다 자목련 꽃잎들이 쉰 목청으로 떨어져 내렸고 병원을 오가는 길 옆 폐차장 폐차들 속에서 내 모습이 어른거렸다 거울 앞에 서니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고사목 한 그루 물방개며, 풀무치며, 검은 물잠자리 아직도 어린 시절들은 온전히 내 손아귀 안에 꾸물거리고 있건만······ 그래, 내가 지나온 길들은 너무 깊은 물속이거나 너무 높은 벼랑이었어 늘 기다림으로 징검다리를 놓고 기다림으로 검불을 부여잡아야 했지 끼니때마다 고개를 젖혀 한 움큼의 알약을 털어 넣으며 쓰라린 속병의 치유를 기다리는 나는 또 이 기다림의 의미를 무엇으로 유추해야 하나 그사이 꽃 진 자리에 잎들이 다시 돋아나 잎잎이 정..

북리뷰/문학반 2022.02.12

[시] [한때 구름이었다] 방수진 시집

방수진 2019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3~15 雨연히 다시 만날 수 없는 너의 일기장에 흘겨 쓴다 우리는 한때 구름이었다 질량은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고 하지만 충분히 넓고 가벼운 우주, 하나의 홀씨 지상에 떨어지기 전 우리는 아주 가까워지거나 몹시 멀어져 왔다 손을 빠져나가기 전만큼만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어릴 적 아파트 뒷편 공터는 아지트였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도 각자 들고 온 우산을 펴 놓고 들어앉아 허락 없인 못 들어와 으스대곤 했었다 그러다 비가 오면 저마다의 손님을 받아 내느라 한바탕 소통이 일었지 우산을 들고 이곳저곳 달아나기도 했지 우산 없는 아이들보다 우산 있는 친구들의 고함 소리가 더 빨리 잦아들곤 했었다 젖지 않으려면 우산 하나에 모두 숨거나 하나씩 덧댈 수밖에 없어서, ..

북리뷰/문학반 2022.02.11

[시][너를 혼잣말로 두지 않을게] 박상수 시집

박상수 2022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안개 숲 숲은 깊었다 나만 알던, 가끔 누워 있기도 하였던 묘지 주변으로 빗방울이 내리면 나무들이 웅크려 비를 막아주는 것만 같았다 잠든 것들이 깨어나는 시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누구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은 길을 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떠올리던 오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사람, 봉지 약을 들고 찾아간 날, 약을 건네주고 오는 길은 낮은 기침 소리가 따라오는 게 좋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덧없는 꿈이었다 학교 앞 저수지로 걸어 들어간 사람의 물빛을 떠올릴 때면 흘린 듯 그림자가 내게고 옮겨 오곤 했다 텅 빈 운동장에서 누군가 빈 병에 소리를 내고 있구나 그때마다 잘린 여름풀의 향이 퍼져 나가다가 흐린 방을 만..

북리뷰/문학반 2022.02.10

[시][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시집

정호승 1998 개정증보판,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2 사랑한다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p. 13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

북리뷰/문학반 2022.02.09

[시][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최백규 시집

최백규 2022 최백규 시인은 1992년 대구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동인 시집 가 있다.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이다.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5 섬광 착한 사람을 사랑해서 간신히 착해져보려 하던 날들이었다 젊은 아버지는 마른 세면대 앞에서 덜 밀린 턱수염을 쓸며 나를 그렸으나 잘되지 않았다 짙은 안개가 비 냄새를 몰아왔지만 우기가 너무 멀었다 낙엽이 구르는 거리에 어둠만이 젖는 듯하다 휘발했다 번번이 살아남고 더러는 해하기도 하는 호시절이었다 젊은 아버지는 적당한 육체와 한가지 뜻이 있었고 잘못과 실패를 알았다 태운 냄비나 붙잡고 층계참에 주저앉아 남은 동전을 헤아린다든가 현관의 우산을 보며 자신만 기다리는 아내의 장마..

북리뷰/문학반 2022.02.08

[에세이][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1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대하여(책 앞 커버 안의 내용) 이 책은 일본에서 출판된 책이 아니라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이런 책을 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따라 출판되었다. 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들 p. 22 주관적인 인식이지만, 그저 흘러가는 '현재'일뿐인 인터넷 공간에 순간 웅덩이가 생긴 느낌이었다. 웅덩이가 생기면 사람은 처음으로 물을 의식한다. 그 의식이 쌓여 비로소 '앎'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p. 24~25 영화제는 나라는 존재가 자명하게 휘감고 있는 '정치성'을 표면화하는 공간이다. 눈을 돌리든 입을 다물든, 아니 그 '돌리고' '다무는'행위 자체도 정치성과 함께 판단된다. 하지만 이는 물론 영화감독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에 ..

북리뷰/문학반 2022.02.07

[시][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의 사랑시 모음

김용택 2021 김용택의 사랑시 모음 김용택 시인이 자신의 시 중에서 사랑시를 모아 정리한 시집이다. 최근 작품도 일부 포함되어 있고, 김용택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들이 시집 곳곳에 들어있다. p. 20 파장 네 마음 어딘가에 티끌 하나가 떨어져도 내 마음에서는 파도가 친다 p. 23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P. 26 인생 사람이, 사는 것이 별건가요? 눈물의 굽이에서 울고 싶고 기쁨..

북리뷰/문학반 2022.02.07

[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신용목 시집

신용목 2017 신용목 2017 p. 12~13 가을과 슬픔과 새 슬픔이 새였다는 사실을 바람이 알려주고 가면, 가을 새들은 모두 죽었다. 사실은 흙 속을 날아가는 것 태양이라는 페인트공은 손을 놓았네 그 환한 붓을 눕혀 빈 나뭇가지나 건드리는데, 그때에는 마냥 가을이라는 말과 슬픔이라는 말이 꼭 같은 말처럼 들려서 새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네 사실은······이라고 다른 이유를 대고 싶지만, 낙엽이 새였다는 사실을 바람이 알려주고 가는 가을이라서 날아오르는 것과 떨어져내리는 것이 꼭 같은 모습으로 보여서, 슬픔에도 빨간 페인트가 튀는데 나뭇가지라는, 생각에 붓을 기대놓고 페인트공은 잠시 바라보네 그러고도 한참을 나는 다리 위에 앉아 있다 이 무렵, 다리를 건너는 것은 박쥐들뿐······ 단풍의 잎들..

북리뷰/문학반 2022.02.06

[당신의 아름다움] 조용미 시집

조용미 2020 조용미 2020 p. 12~13 당신의 아름다움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다 내가 만든 구도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더불어 당신의 아름다움은 윤리적이어야 한다 당신은 최종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빈틈없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고독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나로부터 발생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늘 가장 큰 시련이다 당신 뒤에는 빛이 있다 당신은 빛을 조금 가리고 있다 p. 16~17 내가 없는 거울 자다 깨어 거울 앞 지나다 얼핏 보니 내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잠깐 잘못 본 건가 다시 거울 앞으로 가기가 겁이 난다 거울 속의 나는 통증을 알지 못하여 이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가 잠시 방심하고 ..

북리뷰/문학반 2022.02.05

[립싱크 하이웨이] 박지일 시집

박지일 2021 박지일 2021 p. 28 못질하기 좋은 해안가 숲 없고 민박 없고 도로도 없다. 나는 그저 못질하기 위해 태어난 망치다. 어디 절실함이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이 순간 태어난 나는 망치다. 나는 처음으로부터 멀어진다. 사방에 깔린 것이 모래니 내려칠수록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나를 기록하는 네가 있어 오늘 해안가로 충분하다. 밀려오는 파도 있으니 밀려가는 파도 있을 것이고 나는 당연한 것만 말하고 싶고 당연한 것이라도 말하고 싶다 제발. 이 순간 나는 너밖에 몰라. 너를 사랑한다. 상투적인가? 질문의 답은 눈 내린다. 네 몫이다. 나는 허공에서 시작하여 바닥에서 끝장나고 싶다. 이것은 눈에 관한 이야기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성실하게 망치 내려치는 나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너의 기록에 ..

북리뷰/문학반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