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227

[빛의 자격을 얻어] 이혜미 시집

이혜미 2021 이혜미 2021 p. 17 빛멍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에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속이었다. 휘황한 - 휘황하다: 광채가 나서 눈부시게 반짝이다. 행동이 온당하지 못하고 못된 꾀가 많아서 야단스럽기만 ..

북리뷰/문학반 2022.02.01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시집

신경림 2013 신경림 2013 p. 9~10 너희 사랑 -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북리뷰/문학반 2022.01.30

[좋은 날에 우는 사람] 조재도 시집

조재도 2007 조재도 2007 p. 12~13 좋은 날에 우는 사람 슬픔의 안쪽을 걸어온 사람은 좋은 날에도 운다 환갑이나 진갑 아들 딸 장가들고 시집가는 날 동네 사람 불러 차일치고 니나노 잔치 상을 벌일 때 뒤꼍 감나무 밑에서 장광 옆에서 씀벅씀벅 젖은 눈 깜작거리며 운다 오줌방울처럼 찔끔찔끔 운다 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어여 눈물 닦고 나가 노래 한 마디 혀, 해도 못난 얼굴 싸구려 화장 지우며 운다, 울음도 변변찮은 울음 채송화처럼 납작한 울음 반은 웃고 반은 우는 듯한 울음 한평생 모질음에 부대끼며 살아온 삭히고 또 삭혀도 가슴 응어리로 남은 세월 누님이 그랬고 외숙모가 그랬고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했을, 그러면서 오늘 훌쩍거리며 소주에 국밥 한 상 잘 차려내고 즐겁고 기꺼운 하루를..

북리뷰/문학반 2022.01.29

[때때로 캥거루] 임지은 시집

임지은 2021 임지은 2021 시인 임지은은 대전에서 태어나, 2015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가 있다. P. 9~10 웃음의 진화 코미디 프로를 봅니다. 우리가 같은 프로를 보는 게 맞나? 할 정도로 너와 나의 웃음 포인트가 다릅니다. 웃음은 만국 공통이라던데, 웃는 얼굴에는 침도 뱉을 수 없다던데 웃을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풀기로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웃어야 할까요? ① 아끼던 반지를 저금통에 빠뜨렸습니다 ② 저금통 배를 갈랐는데 반지가 없습니다 ③ 사실 아꼈던 건 저금통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고, 너는 웃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너와 나는 다릅니다 다르니까 사랑하는 거지, 같아지려고..

북리뷰/문학반 2022.01.28

[내 무덤, 푸르고] 최승자 시집

최승자 1993 최승자 1993 p. 11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3 생명의 욕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죽음의 새, 죽음의 헛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삶의 새. 한 마리 새의 향방에 관하여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하늘은 늘 푸르를 것이다. 보이지 않게 비약의 길들과 추락의 길들을 예비한 채. 마침내의 착륙이 아니라. 마침내의 추락을 예감하며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ㅡ 파문과 ㅍ문 사이에서 춤추는 작은 새의 상한 깃털. 미망(未忘): 아닐 '미', 잊을 '망' - 잊을 수가 없음 비망(備忘): 갖출 '비', 잊을 '망' - 잊지 않게 하려는 준비 p. 16 未忘 혹은 備忘 8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

북리뷰/문학반 2022.01.27

[선택과 결정은 타이밍이다] 최훈, 1%의 미련도 남지 않게 최선의 선택과 결정을 하는 법

최훈 2022 최훈 2022 일본에 두견새 일화로 유명한 세 인물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떻게든 새를 울게 만든다는 히데요시,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에야스, 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린다는 노부나가. 이 이야기는 물론 사실은 아니다. 에도시대 마쓰라 기요시의 수필 를 바탕으로 그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당연 오다 노부나가이다. 결단력과 카리스마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이런 인물을 좋아하는 만큼 내 성향도 그닥 다르지 않다. 사실, 나는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선택 불가 증후군, 메이비족, 햄릿 증후군과는 거리가 ..

[연옥의 봄] 황동규 시집

황동규 2016 황동규 2016 p. 11 그믐밤 여행 도중 받은 아끼던 제자의 부음. 벌써 가는 나인가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이나 보자꾸나, 민박집 나와 언덕을 오를 때 휴대폰 전짓불이 나갔다. 냄새로 달맞이꽃 무리를 거쳐 반딧불이만 몇 날아다니는 관목 덤불을 지났다. 빛이 다가오는가 했더니 물소리였다. 불빛 낮춘 조그만 방같이 환(幻)한 여울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환(幻): 변할 '환' p. 16~17 살 것 같다 49일간 하늘이 이리 찌푸리고 저리 찌푸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간(眉間)을 펴고 오..

북리뷰/문학반 2022.01.26

[사랑은 우르르 꿀꿀] 장수진 시집

장수진 2017 장수진 2017 시인 장수진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했다. 2012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p. 16~17 극야(極夜) 신은 밤새도록 악마와 당구를 치고 잘못 맞은 적구가 당구대 밖으로 튀어 오르면 도시에 태양이 뜬다 딩···딩··· 악마는 발가락을 까딱이며 알람을 울리고 두 팔을 길게 뻗어 잠이 덜 깬 자의 발에 구두를 신겨준다 우리는 걷고 또 걷고 사고팔고 사랑하고 오해하고 추락하고 추억하고 두 노인네는 낮의 당구장에 죽치고 앉아 끝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악마가 이름을 부르면 누군가 태어났고 신이 그 이름을 까먹으면 누군가 사라졌다 그들은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먹은 밥을 먹고 또 먹었다 집에 간다며 악수하고 헤어진 신과 ..

북리뷰/문학반 2022.01.25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에리카 산체스

에리카 산체스 2022 I AM NOT YOUR PERFECT MEXICAN DAUGHTER 에리카 산체스 2022 완벽한 멕시코 딸은 대학에 가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부모님과 함께 산다. 결코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엄마 아빠의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다. 그것은 내 언니, 올가의 역할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훌리아 레예스는 15세에서 16세로 막 넘어가는 시기의 소녀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멕시코에서 시카고로 밀입국한 불법체류자들이고, 엄마는 남의 집 일을 하고, 아빠는 사탕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누가 봐도 아주 모범적인 딸, 올가(훌리아의 언니)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올가의 차가 브레이크 수리를 위해서 카센터에 맡겨지고, 버스로 출근을 하는데, 나중에 엄마가 데..

북리뷰/문학반 2022.01.24

[황금빛 모서리] 김중식 시집

김중식 1993 김중식 1993 p. 34~35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한 여인의 첫인상이 한 사내의 생을 낙인찍었다 서로 비껴가는 지하철 창문 그 이후로 한 여인은 한 사내의 전세계가 되었다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생겼다 세계는 한없이 길고 어두웠으나 잠깐씩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웃을 때는 입이 찢어지고 울 때는 눈이 퉁퉁 붓던 한 사내 그러나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표정의 억양이 문드러지고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어졌다. 과연 일부러, 도대체 일부러 한 여인이 한 사내의 세계를 무너뜨렸겠는가 자기도 어쩔수 없이,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그런 말을 믿는다면 우리..

북리뷰/문학반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