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227

[시] [아껴 먹는 슬픔] 유종인 시집

유종인 2001 場(장): 마당 '장' 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 여러 가지 상품을 사고파는 일정한 장소. 罷場(파장):파할 '파', 마당 '장' 장이 파하는 것. 모임이 거의 끝남 生前(생전): 날 '생', 앞 '전' 死後(사후): 죽을 '사', 뒤 '후'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2 팝콘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칼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못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嘔吐(구토): 게우다, 토하..

북리뷰/문학반 2022.02.20

[시]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황인숙 시집

황인숙 2016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갱년기 이번 역은 6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삼각지역입니다 삼각지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으로 우르르 달려온다 열리는 출입문을 향해 사람들이 통로를 필사적으로 달려온다 다시는 오지 않을 열차라도 되는 양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이런, 이런, 그들을 살짝 피해 나는 건들건들 걷는다 건들건들 걷는데 6호선 승차장 가까이서 열차 들어오는 소리 어느새 내가 달리고 있다 누구 못잖게 서둘러 달리고 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런, 건들거리던 내 마음 이렇듯 초조하다니 놓쳐버리자, 저 열차! p. 55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하얗게 텅 하얗게 텅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북리뷰/문학반 2022.02.19

[시] [오늘 아침 단어] 유희경 시집, 영화 <좋아해줘>에서 최지우가 페이스북에 올린다고 사진 찍을 때 들고 있던 시집

유희경 2011 영화 에서 정성찬(김주역)의 코치를 받으며 함주란(최지우)이 페북에 올릴 사진을 찍는 장면중에 나오는 시집. p. 12~1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

북리뷰/문학반 2022.02.18

[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시집, 영화 <좋아해줘>에서 유아인이 들고 있던 시집

심보선 2008 영화 에서 조경아 작가(이미연)가 노진우(유아인)에게 "너의 길을 가라..."라는 글귀와 함께 선물했던 시집. 노진우(유아인)가 그 시집을 뒤적이다가 둘이 찍은 사진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시집이다.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8~19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잿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

북리뷰/문학반 2022.02.17

[시]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김진규 시집

김진규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7~19 몇 번의 계획 내가 없이도 너에게 소중한 것은 감은 눈 위로 아른거리는 햇빛 널 부르다 내가 머문 곳엔 아로새긴 우리의 이름처럼 선명하게 금이 간 유리잔 하나 너는 들판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눈에 담는다 부유하는 꽃씨들은 빨갛게 불타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본다 해가 지고 밤이 오면 우리는 가장 필요 없는 것들을 모아 불을 지펴야 하는데 몇 번의 계획을 모아 태워야 조금은 밝은 밤이 찾아올 텐데 우리가 손꼽던 가장 소중한 것들은 결국 혼자가 될 테고 어두운 하늘 속엔 검은 오리들 젖은 다리를 품에 꼭 감춘 채 황금빛 잉어들을 물고 날아간다 비늘 같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 우리는 이제 몇 번의 계획 속에서 또 어떤 것들을 가만히 담아두게 될까 또 어떤..

북리뷰/문학반 2022.02.16

[시]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최정례 시집

최정례 201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없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TV에서 캥거루가 권투를 하는 걸 보았어요 사람이 오른손으로 치면 캥거루도 오른손을 뻗어 치고 왼손을 뻗으면 다시 왼손으로 받아치고 치고 받고 치고 받고 사람이나 캥거루나 구별이 안 되더라구요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 중 느닷없이 캥거루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앞발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나는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

북리뷰/문학반 2022.02.15

[시] [무표정] 장승리 시집

장승리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9 무표정 월요일이 비처럼 내리는 밤 일요일 밤 여관 같은 밤 화요일이 엿보는 밤 눈과 시선이 겉도는 밤 0과 1사이에 세워진 정신병원을 세는 밤 그림자가 피의 성분으로 느껴지는 밤 따질 수 없는 밤 산 잠자리를 흙 속에 묻고 물을 주는 밤 눈물 대신 혓바닥을 삼키는 밤 훔친 메모지와 훔친 연필이 서로를 노려보는 밤 떠나는 기차 대신 떠나온 금요일을 응시하는 목요일 밤 버림받은 수요일 밤 수태되기 전날 밤 기억나지 않는 밤 구운 쥐가 밥상 위에 오른 밤 앙상한 토요일 밤의 이마를 관총한 총탄 자국 웃는 밤 P. 20 다른 시간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네 목도 늘어났지 어느샌가 고개를 들어도 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 어디에 있니 네 두 발..

북리뷰/문학반 2022.02.14

[시] [히스테리아] 김이듬 시집

김이듬 2014 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9 사과 없어요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달라고 할까, 아 어쩐다,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커녕 몽땅 뒤집어쓴 적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제 입장을 모르는 바 아..

북리뷰/문학반 2022.02.13

[시] [그대에게 넝쿨지다] 임두고 시집

임두고 2021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잎이 건네는 말 위내시경을 들이밀고 한 두어 달 속병을 앓았다 자목련 꽃잎들이 쉰 목청으로 떨어져 내렸고 병원을 오가는 길 옆 폐차장 폐차들 속에서 내 모습이 어른거렸다 거울 앞에 서니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고사목 한 그루 물방개며, 풀무치며, 검은 물잠자리 아직도 어린 시절들은 온전히 내 손아귀 안에 꾸물거리고 있건만······ 그래, 내가 지나온 길들은 너무 깊은 물속이거나 너무 높은 벼랑이었어 늘 기다림으로 징검다리를 놓고 기다림으로 검불을 부여잡아야 했지 끼니때마다 고개를 젖혀 한 움큼의 알약을 털어 넣으며 쓰라린 속병의 치유를 기다리는 나는 또 이 기다림의 의미를 무엇으로 유추해야 하나 그사이 꽃 진 자리에 잎들이 다시 돋아나 잎잎이 정..

북리뷰/문학반 2022.02.12

[시] [한때 구름이었다] 방수진 시집

방수진 2019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3~15 雨연히 다시 만날 수 없는 너의 일기장에 흘겨 쓴다 우리는 한때 구름이었다 질량은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고 하지만 충분히 넓고 가벼운 우주, 하나의 홀씨 지상에 떨어지기 전 우리는 아주 가까워지거나 몹시 멀어져 왔다 손을 빠져나가기 전만큼만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어릴 적 아파트 뒷편 공터는 아지트였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도 각자 들고 온 우산을 펴 놓고 들어앉아 허락 없인 못 들어와 으스대곤 했었다 그러다 비가 오면 저마다의 손님을 받아 내느라 한바탕 소통이 일었지 우산을 들고 이곳저곳 달아나기도 했지 우산 없는 아이들보다 우산 있는 친구들의 고함 소리가 더 빨리 잦아들곤 했었다 젖지 않으려면 우산 하나에 모두 숨거나 하나씩 덧댈 수밖에 없어서, ..

북리뷰/문학반 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