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227

[낙타] 신경림 시집

신경림 2008 신경림 2008 p. 10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p. 13 고목을 보며 그 많던 꿈이 다 상처가 되었을 게다 여름 겨울 없이 자기를 흔들던 세찬 바람도 밤이면 찾아와 온몸을 간질이던 자디잔 별들도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게다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 꽃보다도 또..

북리뷰/문학반 2022.01.22

[산책하는 사람에게] 안태운 시집

안태운 2020 안태운 2020 시인 안태운, 1986년 전주 출생. 201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이 있다. 제35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p. 14 목소리 풍경 소리가 들립니까. 바람이 불었는지. 아니면 무언가 부딪쳤는지. 너는 그곳을 바라보았는데 풍경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너는 풍경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다시 바람이 불기 전에. 무언가 부딪치기 전에 사람을 찾아야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런 일도. 풍경 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았고, 그러므로 너는 손가락으로 풍경을 건드려보지만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는군요. 소리가 없군요. 너는 네 목소리를 내봅니다. 네 목소리를. 입술을 동그랗..

북리뷰/문학반 2022.01.21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집

박준 2018 박준 2018 p. 9 선잠 그 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p. 27 낮과 밤 강변의 새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떠나는 일이었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답으로 돌아왔다 동네 공터에도 늦은 눈이 내린다 p. 31 묵호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북리뷰/문학반 2022.01.20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시집

황동규 2003 황동규 2003 p. 13 어떤 나무 다시는 세상에 출몰하지 않으려고 배에 돌을 달고 물 속에 뛰어든 사람 그 중엔 밧줄 풀어져 막 풀어진 눈으로 세상 구경 다시 한 사람도 있다. 안부 궁금하다. 한 오백 년 살며 몇 차례 큰 수술하고 사람 머리보다 더 큰 돌덩이 여럿 배에 넣고 넉넉하게 서 있던 나무 제주 애월에선가 만난 팽나무. 그 몸으로 어디 뛰어들어도 되떠올라 어리둥절할 일 없으리. 어느 날 돌덩이들만 땅에 내려 어리둥절하리. p. 14 쨍한 사랑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북리뷰/문학반 2022.01.19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신용목 시집

신용목 시집 2004 신용목 시집 2004 p. 20~21 우물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

북리뷰/문학반 2022.01.18

[세상의 모든 비밀] 이민하 시집

이민하 2015 이민하 2015 p. 26~27 휴일의 쇼 사람들은 휴일을 사랑하고 나도 휴일이 좋아 연중무휴 휴일이다. 일요일과 월요일의 철책을 없애고 빈방 같은 휴일이 쌓인다. 사람들은 빈방을 사랑하고 나도 빈방이 좋아 천지사방 빈방이다. 빈방마다 따끈한 철가방이 배달된다. 불어터진 햇발을 씹고 입가에 묻은 어둠의 소스를 훔치면 낯선 시간 속으로 지금 막 이사 온 기분. 뼈를 끌러 내장이라도 쏟고 윤이 나도록 닦으면 처박혀 있던 핏물이 엎질러져 물걸레를 짜듯 째지는 기분. 사람들은 휴일에는 더욱 바쁘고 나도 휴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쉬지 않고 지껄인다. 사람들은 빈방에서 더욱 요란하고 나도 빈방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럴듯하게 꾸며댄다. 욕실을 해변처럼 꾸미고 거실을 동물원처럼 꾸미고 책장에는 ..

북리뷰/문학반 2022.01.18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우즈훙, 나르시시즘과 외로움, 내 안의 나와 터놓고 대화하기

우즈훙 2022 우즈훙 2022 나르시시즘과 외로움 내 안의 나와 터놓고 대화하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을 허하라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 기존의 자기애가 강하여 조금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르시시즘에 대하여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자기 내면에 잠재된 나르시시즘 수준의 발현에 따라서 사랑의 온도가 변하고, 관계의 유착정도도 달라진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도 영향을 준다고 한다. 즉, 높은 수준의 나르시시즘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가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늘 열정이 넘치지만, 그 반대인 사람은 자신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수치심까지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로움도 나르시시즘에서 유발된다고 보는데, 나르시시즘의 정도에 따라, 혹은 그..

[다른 시간, 다른 배열] 이성미 시집

이성미 2020 이성미 2020 시인 이성미는 2001년 에 '나는 쓴다'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 이 있다. 제5회 시로 여는 세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p. 20~21 접힌 하루 하루가 접혀 있었다.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걸었던 것이다. 토요일은 접힌 종이 속에 있었다. 땅 밑에 녹색 어둠이. 어둡고 기름진 흙에서 검은 식물들이 자랐다. 종이 사이에. 하루가 있었다. 금요일 아침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금요일 아침을 책상 위에 둔 채 책상 앞을 떠났다. 걸었다. 딴생각을 했을 것이고, 딴 곳을 걸었을 것이다. 일요일 오후의 희미한 공기들이 나를 둘러쌌다. 나무에는 일요일 오후의 잎들이. 잎들에는 일요일 오후의 햇빛이. 일요일 오후의 바람이 잎들을 흔들었다. 일요일의..

북리뷰/문학반 2022.01.16

황동규 [꽃의 고요], 황동규 시집

황동규 시집 2006 황동규 시집 2006 p. 17 연필화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입으리. p. 27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p. 45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

북리뷰/문학반 2022.01.15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시집

이영주 2019 이영주 2019 이영주 시인은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시집 , , 이 있다. p. 16~17 기념일 사라진 나를 찾고 있던 시간, 물줄기처럼 기후가 흘러간다. 아무도 머물지 않고, 나도 있지 않다. 만질 수 있고 만져지지 않는 물질, 따듯한 그릇 안의 곰팡이, 투명한 구름에서 떨어지는 입자를 잡는 긴 판 같은 것. 기후는 틈으로 움직인다. 어디에도 없는 나는 길어지는 팔, 나를 안고 나를 밀어내느라 팔은 점점 더 가늘어진다. 한겨울 폴란드에 있다. 폴란드 그릇 안에서 번식하고 있다. 불행하게 죽은 영혼은 모든 기억을 씻어버리는 물을 마시고 깨끗해진다는데, 나는 그릇을 엎질렀어! 시큼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벽 틈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있다. 우리의..

북리뷰/문학반 2022.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