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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연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정다연 2021 정다연 2021 p. 38~39 무기력 요즘 나는 바싹 마른 잎 같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하루 세번 약을 먹고 개와 산책한다 혼자에 가까워지고, 주기적으로 볕을 쬐는 일은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믿으며 공원에 도착한다 체조는 허파와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믿는다 아무런 의심 없이 땅에 박혀 있는 벤치와 그 앞에 세워진, 적을 몰살한 전쟁 영웅의 동상을 믿는다 그것이 가져다준 평화를 한번도 깨진 적 없는 눈동자 무너질 듯, 넘어질 듯 자전거 핸들을 꺾는 아이의 등 뒤로 더는 날아가지 않은 비둘기 빛으로부터 동공이 시야를 열고 닫듯 울타리는 잔디를 계속해서 보호할 것이다 가두는 분수대를 뛰어내리는 물방울 물방울들 너무 가까이 가진 않는다 p. 53~5..

북리뷰/문학반 2022.01.04

신용목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신용목 2021 신용목 2021 신용목 시인(1974년생, 경남 거창)은 2000년 신인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는 시집 , , , 산문집 , 소설 (2021) 등이 있다. p. 25 대부분의 나 하루의 망치로 쾅쾅 나는 박아 넣으면 까맣게 바닥에 남을 한 점의 머리 비행기가 지나가면 하늘이 길게 잘려서 어둠 한끝이 돌돌 말려 올라간다 지붕 위에 비스듬히 누워, 먼 별빛을 보던 바람이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며,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악몽이 잠의 창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내 속의 아이들을 부른다, 밥 먹고 울어야지 턱밑에 장도리를 걸고 머리를 뽑아올리면 나는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인생이 잠시 들려 사랑을 주고 젊음을 사가는 매점처럼 뽑힌 자리는 환하다 p. 46~47 나를 깨우고 갔..

북리뷰/문학반 2022.01.03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질투는 나의 힘,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2019 이 시집은 2019년 기형도 시인(1960~1989)의 30주기를 맞아 시인의 모든 시를 묶어 출판된 책이다. 유고 시집인 에 있는 시들과 에 실려 있는 미발표 시들을 함께 모아서 97편의 시들을 수록하고 있다. 기형도 시인은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로 있으면서 그 해(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등단하게 된다. 기자로서 문화부와 편집부를 거치며 일하는 동안, 계속해서 시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미 그 당시 천하의 비평가 김현으로부터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바흐친이 이론화 한 것으로, 사물들의 자유로운 결합과 육체적 현상에 대한 과장된 묘사로 기괴한 느낌을 통해,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을 폭로하는..

북리뷰/문학반 2022.01.02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최승자 1981 최승자 시인은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서 '이 시대의 사랑'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 시집은 첫 시집인 것이다. 스스로를 누르고 있는 절망이나 슬픔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그 속에 빠져있는 시인의 시 세계가 암울하기 그지없다. 조금은 들뜬 사랑노래를 기대했다면, 첫 시를 읽는 순간 내려놓아야 한다. p. 9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

북리뷰/문학반 2022.01.01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안희연 2021 올해 알게 된, 멋진 시인이다. 얼핏 읽으면 이게 뭔가 싶다가도, 다시 읽으면 머리에 진동이 울린다. 좋다. p. 12~13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

북리뷰/문학반 2021.12.31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김재진 p. 36~37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을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에요, 여기에요, 손짓한 적 있습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것..

북리뷰/문학반 2021.12.30

[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최승자 2010 p. 13 세월의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 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p. 32~33 어떤 한 스님이 어떤 한 스님이 한 백 년 졸다 깨어 하는 말이 "心은 心이요 物은 物이로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잘 섞이면 心物이 만들어지고 物心이 만들어지고 사다리의 어느 위 계단으로 올라가면 초롱초롱 조롱박들이 한창 열려 있다 그리하여 心物이 物心이 되고 物心이 心物이 되고 (실인즉슨 心이 物이 되고 物이 心이 되고) 한번 해보자 하면 그 구별들은 한이 없고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하면 순식간에 똑같은 세상이 된다 (아주 우울한 날에는 우윳빛 막걸리를 한두 잔..

북리뷰/문학반 2021.12.30

[대추 한 알] 장석주 시인의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장석주 시선집 2021 p. 30~31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나는 안다, 내 깃발은 찢기고 더이상 나는 청춘이 아니다. 내 방황 속에 시작보다 끝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다. 한번 흘러간 물에 두 번 다시 손을 씻을 수 없다. 내 어찌 살아온 세월을 거슬러올라 여길 다시 찾아올 수 있으랴. - 쉽게 스러지는 가을 석양 탓이다. - 잃어버린 지도 탓이다. 얼비치는 벗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안고 흐르는 계곡의 물이여, 여긴 어딘가, 내 새로 발 디디는 곳 암암히······ 황혼이 지는 곳. - 서편 하늘에 풀씨처럼 흩어져 불타는 새들. - 어둠에 멱살 잽혀 가는 나. p. 32~33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

북리뷰/문학반 2021.12.30

[부동산 등기부 열람] 부동산 등기부 인터넷 발급

최근에 부동산 등기부 열람이 필요한 일이 있었다. 보통은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통해서 발급을 받아서, 개인적으로 이게 필요한 일은 처음이었다. 집 앞 부동산에 들릴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는데, 굳이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니까. 내가 잘하는 검색을 하자. 인터넷 검색창에 부동산 등기부 인터넷 발급이라는 항목을 쳐보니, 바로 발급이 가능한 사이트가 보였다. 그 아래에 있는 항목들을 열어보아도, 똑같은 사이트가 열려서 마치 인터넷 발급은 그곳을 통해서만 가능한듯한 느낌이 들었다. 별 의심(?)도 없이, 등기부가 필요한 주소를 치고 확인을 누르니, 발급 수수료에 7천 원 가까이 되는 비용이 보였다. 순간 드는 생각이, 이 정도의 비용이면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발급비용을 받을 거 같다는 느낌? 그럼..

끄적끄적 2021.12.29

[맨발] 문태준 시집

문태준 시집 2004 p. 12 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p. 30~31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북리뷰/문학반 2021.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