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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사는 기쁨]

황동규 2013 황동규 2013 p. 9 이별 없는 시대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어 갈라지겠는가? 허허. p. 30~33 영원은 어디? 때아닌 추위 강습. 오리털 점퍼 끄집어내 덧입고 나선 산책길 길섶 누른 풀은 눈 맞고 얼어 풀떡 범벅되었고 아직 땅에 내려오지 못한 졸참나무 잎새들이 머리 위에서 쓰렁쓰렁 귀 시린 발성을 한다. 너는 지금 네 추위 속을 걷고 있어. 언덕을 넘자 서리 허옇..

북리뷰/문학반 2022.01.12

최승자 [즐거운 일기]

최승자 1984 최승자 1984 p. 33~34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

북리뷰/문학반 2022.01.11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김사인 p. 10~11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 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붇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곁으로 나비나 별이나 별로 고을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이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북리뷰/문학반 2022.01.10

박우현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박우현 박우현 p. 17 꺽지 그는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닮았다 그는 싸움을 잘한다, 물고기의 왕이다 그는 먹이를 위하여 서둘지 않는다, 어슬렁거린다 그는 죽은 것을 결코 먹지 않는다, 차라리 굶어 죽는다 그는 고독하다, 늘 혼자다 그는 고독하지 않다, 고독마저 권태로울 때 큰 입으로 하품할 뿐이다. 아니 아니, 그는 어느 사내를 닮았다. 꿈은 잃어버리고 땅콩 껍질 같은 욕망만 남아 쓸쓸해 하는 p. 34~35 양산에 대하여 남자들은 왜 양산을 쓰지 않을까? 금남금녀의 구별이 사라진 시대에 귀걸이 목걸이 다 하면서 화장 다 하면서 덥다고 난리치면서 에어컨 펑펑 틀면서 선크림 떡칠해 바르면서 얼굴 검게 탈까봐 여자들 이상으로 신경 쓰면서 참 이상하다. 비 오면 우산 쓰듯이 햇빛 나면 양산 쓰는 것이 뭐가 문..

북리뷰/문학반 2022.01.09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황동규 2020 황동규 2020 황동규 시인의 열일곱 번째 시집 1938년생,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의 황순원 작가의 아들이다. 1958년, 19세에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로 등단했다. 60여 년 동안 시를 쓰고 있는 황동규 시인은 이번 시집이 마지막 시집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계속 시는 쓰겠지만, 그 시들은 유고시집에나 실리지 않겠냐며. 열렬한 팬으로... 앞으로도 많은 새로운 시집이 계속되기를... p. 16~17 오늘 하루만이라도 은행잎들이 날고 있다. 현관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또 하나의 가을이 가고 있군.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 옆 층계에 발 올려놓기 전 미리 진해지려는 호흡을 진정시킨다. 해 거르지 않고 한 번쯤 엘리베이터 수리하는 곳. 몇 번 세고도 또 잊어버리는 한 층 계단 수보다..

북리뷰/문학반 2022.01.09

김경후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김현문학패 수상 이후 첫작품

김경후 2021 김경후 2021 시인 김경후는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 , , 가 있다. 2015년 현대문학상, 2019년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p. 12 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 짐 부리는 사내, 빈 그릇 위에 빈 그릇, 의자 위에 의자, 쌓고 쌓는다, 귀신이 쉬는 날, 사내의 짐값은 높지만, 꼭대기 올라가는 사다리차만큼, 덜컹, 덜컹, 내려앉은 사내의 등, 사내는 손 없는 날의 손, 집을 옮기며 짐을 부린다, 동서남북을 옮긴다, 기억을 옮긴다, 귀신도 부리지 못할 짐, 벽 같은 짐들 앞, 짐의 주인이 말한다, 나뭇잎 그려진 상자 못 뵜어요? 기억 안 나요? 안 나요,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오늘 사내는 손이 없다, 힘이 없다, 불탄 낙엽 더미..

북리뷰/문학반 2022.01.08

김용택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김용택 2021 김용택 2021 p. 28 아름다운 산책 하늘이 깨끗하였다 바람이 깨끗하였다 소리가 깨끗하였다 달아나고 싶은 슬픈 이슬들이 내 몸에서 돋아났다 p. 29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수 없다 이슬 내린 풀밭을 걷다 뒤돌아보았다 이슬길이 나 있다 내 발등이 어제보다 무거워졌다 내가 디딘 발자국을 가만가만 되찾아 디뎌야 집에 닿을 수 있다 p. 32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잘 왔다 어제와 이어진 이 길 위에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나비를 숨겨준다 해야 바람아 흰 구름 떼야 내 자리를 찾아온 여러 날이 오늘이다 알 수는 없지만 어느, 고요에서 태어난 바람이 온다면 가벼이 날아오를 수 있다 기다려라 마음이 간 곳으로 손이 간다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이 나비를 숨겨둔다 p. 45 지금이 그때다 모든..

북리뷰/문학반 2022.01.08

김중식 [울지도 못했다]

김중식 2018 김중식 2018 김중식 시인은 1967년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90년 을 통해 등단했다. 1993년 첫 시집 를 출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따뜻한 비관주의자"라고 강상희 문학평론가의 평을 들었다. 문단의 평도 좋았고, 나름 대중적인 지지도 받았지만, 그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김중식 시인은 시를 써내지 않았다. 1995년 일간지 기자로 취직해 일을 하면서, 잠시 짬을 내어 시를 쓰는 일은 시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생업이 있으면서 시를 쓰던 사람을 얕잡아 봤다는 고백과 함께 말이다. 이런 자신의 심정을 담아, 두 번째 시집인 의 앞부분에 "나는 근본주의자였다/두 손으로 번갈아 따귀를 맞았다"라는 표현으로 그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김중식 시인은 경향신문 기..

북리뷰/문학반 2022.01.08

[무거운 마리모 떠오름] 큰 마리모도 떠오를 수 있다. 시원한 물과 빛만 있다면.

드디어 큰 마리모도 떠올랐다. 역시 마리모를 떠오르게 하는 비결은 아주 시원한 물과 적당한 빛이었다. 직사광선은 NO! 작은 마리모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이후로 딱 한 달만의 일이다. 처음에 작은 마리모가 떠올랐을 때는 정말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생각해서, 큰 마리모한테는 적용시켜 볼 생각 자체를 못했다. 안 했다. (사실 적용을 안 했다기보다, 나름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기의 차이에서 영향을 조금은 덜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작은 마리모들이, 물을 갈아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을 보고 바로 이거다 싶었다. 지난주에는 반응이 없었는데, 드디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분명히 물과 빛의 영향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는데, 큰 마리모가 반응이 없자, 아이 둘의 반응은 똑같았다. ..

끄적끄적 2022.01.07

최승자 [기억의 집]

최승자 1989 최승자 1989 p. 14 이제 전수할 이제 전수할 슬픔도 없습니다. 이제 전수할 기쁨도 없습니다. 떠납니다. 막막 하늘입니다. 떠나지 못합니다. 배고픔뿐인 그대와 배고픔조차 없는 내가 피하듯 서로 만나 배고픈 또 한세상을 이룩하는 것을 고장난 신호등처럼 바라봅니다. (꿈이여 꿈이여 늙으신 아버님의 밑씻개여) p. 15 길이 없어 길이 없어 그냥 박꽃처럼 웃고 있을 뿐. 답신을 기다리지는 않아요. 오지 않을 답신 위에 흰 눈이 내려 덮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 가나봐요. 가난하지만 이 房은 다정하군요. 흐르는 이 물길의 정다움. 물의 장례식이 떠나가고 있어요. 잊으시지요. 꿈꾸기 가장 편리한 나는 무덤 속의 나니까요. 방(房): 방 '..

북리뷰/문학반 2022.01.06